ⓒphoto 박수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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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은 서민을 친근하게 그려온 국민화가이다. 그는 ‘한국의 밀레’라고도 칭송된다. 12세 되던 해 밀레의 ‘만종’ 복사판을 보고 감동했던 것이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결정적 계기였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딛고 우뚝 선 독학화가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서민화가’의 꿈을 이뤄낸 불굴의 인물이다.

“쓰라린 세월의 고통과 신음소리까지도 화강암 질감 같은 화폭 속으로 가라앉혀서 따뜻한 긍정과 선의의 세계를 열었던 미의 순교자였다.”(김병종 ‘화첩기행’)

“박수근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전형적인 서민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작가상 역시 ‘서민의 화가’이다. 이는 박수근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는 오직 박수근 한 분만의 작가상인 것이다.”(유홍준 ‘박수근의 삶과 예술’ 강연회 2003년 5월 10일)

“나목(裸木)으로 상징되는 박수근의 작품세계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살면서 상실하기 쉬운 휴머니즘의 가치를 새롭게 되새겨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장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국제적인 화가로 자리잡은 그의 조형적 실천을 재평가, 국제화의 미로 속에서 길찾기에 여념이 없는 오늘날 우리 미술계가 정체성의 숙제를 풀어나가는 데 하나의 지침을 삼을 수 있으리라는 바람이 있다.”(안소연 삼성미술관 책임연구원)

“박수근은 자신의 시각과 언어로 시골생활을 그렸다는 점에서 다른 화가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겨우 보통학교 때의 지식을 토대로 오직 선전(鮮展)을 통해 남의 그림을 접하고 자기의 실력을 쌓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처럼 불리한 조건이 어느 면에서는 그의 주체적 시각을 확고히 해주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김윤수 ‘한국현대회화사’)

박수근은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에서 박형지(朴亨智)와 윤복주(尹福珠)의 3남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 팔십 노령의 조부와 부모, 딸 세 자매가 단란하게 부농으로 살고 있었으나, 아들이 없어 조부는 다른 며느리를 얻어서라도 손자를 보길 원했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부친은 이를 허락하지 못하던 중 박수근을 갖게 되어 애지중지하였다.

박수근은 5살 때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7살 때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집안은 농사를 짓고 장사도 하여 부유한 편이었으나 이즈음 광산에 손을 대 큰 손해를 본 데다가 홍수로 전답마저 물에 잠겨 졸지에 곤궁해진다. 지금 정림리의 생가는 헐려 밭이 되었으며, 뒷동산에는 군인아파트가 들어섰다. 학교에서는 그림에 재능을 보였는데, 어느날 밀레의 ‘만종’ 복사판을 보고 “나는 이담에 커서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림을 그려서 선생님께 제출하면 꼭 벽에 붙곤 하였다. 그래서 늘 도화시간만 기다리셨고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교장 선생님이 일본 사람이었는데 성남 아버지의 그림 솜씨를 알고 항상 격려를 해주시고 가끔 집에 찾아오셔서 그림연필과 도화지도 사주시며 그림을 열심히 그리라고 당부하시곤 하셨단다.”(‘아내의 일기’ 박수근의 처 김복순)

박수근은 18세 되는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되자 큰 용기를 얻는다. 그림에 나오는 농가는 그의 생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연속 3년간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가정적으로는 모친이 별세하고 부친은 얼마 안되는 가산을 정리하여 금강산 마을인 금성으로 들어간다.

박수근은 춘천에 홀로 남아 극심한 곤궁의 나날을 보내며, 도화연필을 살 돈마저 없어 직접 뽕나무를 잘라다 태워서 목탄을 만들어 그린다. 다시 1934년에는 ‘일하는 여인’으로 선전에 입선한다. 신인들에게 공모전은 곧 자기검증의 기회이고 자신감을 갖게 되는 계기여서 박수근은 이후 선전이 끝나는 1943년까지 해마다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화가의 길을 다진다.

춘천에서 포천으로 다시 서울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박수근은 1939년에 재혼한 부친이 동생들과 살고 있던 금성에 갔다가 이웃의 부잣집 처녀 김복순(金福順)을 사귀며, 이듬해 금성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하고 3일째 되던 날 우리는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의 그 사흘 동안 그이는 하모니카로 반주를 하고 나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일이 꿈결같이만 느껴진다. 그후부터 그이는 선전(鮮展)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몇 시간씩 그의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곤 했다. 그때 내가 모델을 한 건 주로 망질하는 여인이었다. 처음 모델을 하는 거라 참으로 힘이 들었으나 나는 하느님께 이 작품이 잘 그려져서 선전에 낙선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곤 했다.”(‘아내의 일기’)

박수근은 신혼 3개월 만에 평남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되어 아내와 떨어져서 살게 된다. 이듬해 아내를 평양으로 데려와 다시 신혼을 보내면서 최영림·장리석·황유엽 등 평양의 화가들과 주호회(珠壺會)를 만들어 교유하며 전시회에 출품도 한다. 당시 박수근의 생활은 궁핍했다.

“그이가 타오는 봉급 32원으로는 방세를 떼고 나면 항상 적자였다. 두 동생의 봉급에서 얼마간 쪼개고 나머지는 내가 도울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쓰는 비행모(털실로 짰음)의 일감을 맡아 20원을 모아 그해 겨울 김장을 무난히 해낼 수 있었다. 겨울을 채 나기도 전에 시댁에 있던 시누님의 아들 둘, 그리고 시어머님의 조카까지 얹혀 식구가 7명으로 불었다.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좁은 단칸방에 살림도구와 그림도구, 게다가 7명의 인원이 북적대니 밤의 잠자리는 몸을 뒤척일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다.”(‘아내의 일기’)

광복이 되자 박수근은 도청 서기직을 버리고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교사가 된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박수근은 가족과 함께 금성에서 몇십 리 떨어진 두메산골로 피란한다.

“빨갱이들이 우리가 피신해 있는 집에 들이닥쳤다. 그이는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내려와 주무셨는데… 따발총을 멘 두 사람이 들어오면서 남편을 내놓으라고 야단이다.… 그이 대신 내무서로 연행되어 온갖 고문을 받으며 수모를 견뎌야 했다. 두 살짜리 아기를 품에 안은 채, 그이는 산에서 왜정 때 징용을 피하려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무덤같이 생긴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 며칠을 버티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매일 매일 밥을 날라다 드렸다.”(‘아내의 일기’)

박수근은 1·4후퇴 때 가족을 남기고 홀로 남하하며 그 와중에 셋째아들을 잃는다. 그는 군산까지 내려가 부두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이듬해 가을 서울 창신동 큰처남 집에 와서 처자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남매를 데리고 그곳으로 찾아온 아내를 극적으로 만난다. 이 무렵 가족과의 새로운 생계를 위해 혜화동에서 화가 이상우가 운영하던 화방의 주선으로 싼값으로라도 그림을 팔려고 나다닌다.

1953년 이상우의 소개로 미군 CID(범죄수사대)에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어 다니다가 미8군 PX(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그림 품을 팔면서 생계를 꾸려간다. 이때 PX에서 경리를 보던 여성이 소설가 박완서씨였다. 박완서의 ‘나목’은 바로 박수근을 소재로 한 소설이고, ‘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이라는 박완서씨의 증언은 당시 박수근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려준다.

“어느날 그가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출근했다. 나는 속으로 ‘꼴값하고 있네. 옆구리에 화집 낀다고 간판쟁이가 화가 될 줄 아남’ 하고 비웃었다. 순전히 폼으로만 화집을 끼고 나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화집을 펴들고 나에게로 왔다. 얼굴에 띤 망설이는 듯 수줍은 듯한 미소가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마치 선생님에게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그가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촌부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선전에 입선한 그림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일제시대의 관전(官展)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겼던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간판쟁이 중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건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내가 그동안 그다지도 열중한 불행감으로부터 문득 깨어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의 수모를 말없이 감내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박완서 ‘초상화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

이 무렵 박수근은 초상화를 그려 모은 35만원으로 창신동에 조그마한 판잣집을 마련하고, 작은 마루를 제작공간으로 삼아 작품에 몰두한다. 1953년 휴전 후 속개된 제2회 국전에 출품하여 ‘집’은 특선, ‘노상에서’는 입선을 한다. 1954년에는 ‘풍경’과 ‘절구’가 국전에서 입선하며, 대한미협전에 회원으로 ‘산’과 ‘길가에서’를 출품한다.

이후 1956년까지 국전에 계속 출품하여 입선하면서 남한사회에서도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다.

그러나 1957년 제6회 국전에 출품한 100호 대작의 ‘세 여인’이 낙선하자 박수근은 크게 실망하여 슬픔에 빠져 폭음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듬해 국전에는 아예 출품조차 하지 않는다. 다만 반도화랑을 통하여 주로 미국인 미술애호가들이 그의 그림을 구입함으로써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가끔 미군들이 집으로 찾아와 그림을 감상하고 사가기도 했다. 그때 한 미군이 그이를 돕겠다고 일본에 가서 화구와 붓과 캔버스를 많이 사다주었다. 그때부터 PX를 그만두고 그림만 그리셨다.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이 그의 친구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오셔서 그림을 상설전시할 수 있는 화랑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그 부인들이 주선해서 반도호텔에 반도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매일 소품을 그려 반도화랑에 내가곤 했다. 그때 한국에 왔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미국인들이 가끔 작품을 사가지고 가곤하여 그것으로 우리는 생계를 이어갔는데 생활고가 말이 아니었다.”(‘아내의 일기’)

당시 박수근의 모습은 갤러리현대 박명자 사장이 반도화랑 시절을 회고한 글 속에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나중에 미망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박수근 선생님이 반도화랑에 자주 오신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작품이 팔렸으면 생활비를 가져가려는 것이었고, 둘째는 저녁에 술자리라도 있는가 궁금해서이고, 셋째는 몸이 부어서 용변을 보기 힘든데, 반도호텔에는 양변기가 있어서 편하기 때문이었다.”(박명자 ‘나의 삶, 나의 생각’ 경향신문 1994년 6월 24일자)

그러나 이 무렵 박수근은 더욱 확실해진 표현적 특질과, 가난한 서민생활에 사랑의 눈길을 집중시키는 정신적 주제의 일관성과 독특한 조형성으로 놀라운 예술세계를 실현하고 있었다.

“그 스스로 미석(美石)이란 아호를 가지고 있으면서 화강암 조각을 늘 곁에 두고 그 질감을 재현하려 노력했던 박수근은 기름기가 제거된 유화물감을 오랜 시간을 두고 거듭해서 바름으로써, 회화적 재현의 공간을 넘어 물질적 현존의 공간을 구축해냈다.”(안소연 삼성미술관 책임연구원)

박수근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할아버지와 손자, 아기를 업은 소녀, 공기놀이하는 소녀, 할머니, 행인 등 모두 서민의 일상 모습이다. 박수근의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나무의 의미 역시 그의 인물과 비슷할 것이다. 박완서의 ‘나목’에서 그 고목의 뜻을 읽게 된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 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 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달도록 절실하다.”

박수근이 창신동에 살 때 이야기다. 여름날 비가 오기에 부인이 우산을 가지고 동대문 버스정류장에 나가서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리시는 그이와 같이 오는데 노상에서 우산을 받고 앉아서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 세 분이 나란히 앉아 계신다. 그 옆을 지나시다 아이들 과일을 사다주자고 하시면서 한 아주머니에게 몇 알, 다음 아주머니에게서 몇 알 사시기에, 내가 비오는데 한 군데서 사시지 뭘 그렇게 여기저기서 사시느냐고 했더니 ‘한 아주머니에게서만 사면 딴 아주머니들이 섭섭해 하지 않아?’ 하시면서 세 아주머니에게서 골고루 사셨다.”(‘아내의 일기’)

1958년에는 ‘노변의 행상’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 동서미술전에 출품된다. 반도화랑의 창설자였던 미국인 여성 화상 겸 수장가였던 실리아 지어맨의 컬렉션이었던 작품이다. 뉴욕의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회화전에도 ‘모자(母子)’ ‘노상(路上)’ ‘풍경’을 출품한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녀 인숙씨와 차남 성남씨.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녀 인숙씨와 차남 성남씨.

1959년 박수근은 국전 당국으로부터 추천작가 결정을 통고받아 이해의 8회 국전에 ‘한일(閑日)’과 ‘앉아있는 아낙과 항아리’를 출품한다. 조선일보사 주최 3회 현대작가 초대전에 ‘봄’ ‘쉬고 있는 여인’ ‘노인과 유동(遊童)’을 출품한다. 1962년에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며, ‘소와 유동(遊童)’을 출품한다. 그러나 박수근은 국전 막후의 심사과정에 갈등을 느낀 것 같다.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 심사를 하고 들어오시던 날 ‘나는 심사위원이 되더라도 다시는 심사 안 하겠어. 모르고 한 번 했지만 두 번 다시 할 것이 못 돼. 내가 알았으면 안 하는 건데’ 하셨다. 나는 아직도 그분의 말씀에 의혹이 많다.”(‘아내의 일기’)

박수근은 여러 가지 내면적인 고독을 이기려고 과음을 계속하던 끝에 신장과 간이 나빠진다. 그 때문에 발병했던 왼쪽 눈의 백내장을 앓으면서도 수술비용이 없어 악화된 뒤에야 수술을 한다. 수술결과가 나빠 다른 병원에 가서 시신경을 끊는 재수술로 한쪽 눈을 아주 못 보게 된다. 그후로는 오른쪽 한눈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했다. 박수근은 1965년 5월 6일 간경화와 응혈증으로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된다.

박수근은 김복순과 사이에 4남2녀를 낳았으며 장녀 인숙(68·세종대 미술과 졸업)씨와 차남 성남(65·협성신학대 중퇴)씨가 생존해 있다. 인숙씨는 인천여중 교장을 정년퇴임하였으며, 천명운(75·연세대대학원 영문학과 졸업, 인천 검단중 교장 정년퇴임)씨와 결혼하여 아들 형제를 두었다. 인숙씨의 장남 천정국(42·단국대 경영학과 졸업)씨는 한양증권 과장으로 박지경(38·경북대 가정학과 졸업, 연수고교 교사)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천정현(39·신구대 공예과 졸업)씨는 사진가이다. 박수근의 차남 성남씨(화가)의 장남 진흥(39·인도 델리 미대 졸업, 호주 웨스턴시드니대 시각예술학 석사)씨는 정미영(39)씨와 결혼했으며, 차남 진영(37·스위스 레로쉬대 호텔경영학과 졸업)씨는 피카소 아틀리에 매니저이다.

인숙·성남씨 남매와 진흥씨는 박수근의 3대 작품전을 6년 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서 가진 데 이어 올 10월에 서울에서 열어 화단의 주목을 끌었다.

내가 본 미석 박수근

오광수 미술평론가

박수근이 주로 그렸던 것은 평범한 서민의 일상과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소박한 풍경들이었다. 그가 지향한 소재는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이요 생활이었다. 절구질하는 여인, 맷돌 가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시장바닥에 좌판을 벌여놓고 있는 여인, 길거리에 나앉아 담소를 즐기는 종로의 남정네들, 흰 솜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 이제는 추억으로 아련히 떠오르는 풍경들이다. 박수근의 작품이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도 훌륭한 가치를 보이고 있는 예이다. 서양화의 방법이란 문맥에서 분류한다면 그를 서양화가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도달한 조형의 세계는 그러한 상식적인 분류 개념을 극복한 상태이다. 그의 그림을 두고 서양화라고 한다면 이야말로 엄청난 모순을 저지르는 것이다. 한국인에 의해 그려진 한국화라고 했을 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을 얻게 된다. 아마도 그를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고 하는 심미적 배경에는 이같은 사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 사진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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