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위편삼절’, 1904년, 목판채색, 27.6×37.8㎝, 장서각
작자미상, ‘위편삼절’, 1904년, 목판채색, 27.6×37.8㎝, 장서각

공자가 만세의 사표가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비결은 고전의 정리다. 공자는 책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직접 쓴 책은 한 권도 없다. 공자는 동양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화코드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술한 책은 전혀 없다. 공자의 저서로 알려진 ‘논어’조차도 공자가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대신 공자는 당시까지 내려오던 방대한 양의 고전을 읽고 선택하고 정리했다. 공자는 자신의 역할을 ‘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하되 짓지는 않는다)’으로 규정했다. 기존의 학문을 전하되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가 전한 내용은 육예(六藝)다. 육예는 시·서·예·악·역·춘추 등 여섯 종류의 학문(혹은 책)을 뜻한다. 고대인들은 육예를 ‘문학(文學)’이라 불렀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육예를 교재로 삼았다.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 자료를 검토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필요성 때문에 공자는 당시 세상에 남아 있던 자료를 수집하고 체계를 갖춰 선집했다. 말하자면 육예는 공자의 강의안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육경(六經)’이다. 육예는 전국시대에 육경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런 정리가 가능했던 것은 공자가 학문을 좋아하고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위편삼절(韋編三絶·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다)’은 책을 열심히 읽었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 많이 인용하는 사자성어다. 이 사자성어가 공자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책을 읽었다는 데 웬 죽간인가. 종이는 한(漢)나라 때 채륜(蔡倫·50년?~121년?)에 의해서 발명됐다. 그 이전 시기, 즉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대(竹)쪽에다 글씨를 써서 전했다. 대쪽은 여러 개를 가죽으로 엮었는데 그래서 책을 ‘위편(韋編)’이라고 했다. ‘위편삼절’은 공자가 ‘위편’을 어찌나 여러 번 펼쳐봤던지 대쪽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뜻이다. 가죽끈은 튼튼하다. 쉽사리 찢어지는 종이끈이 아니다. 그런 가죽끈이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끊어졌다. 얼마나 자주 만지작거렸으면 가죽끈이 끊어졌겠는가. ‘위편삼절’이란 단어에는 죽간을 수없이 펼쳤다 말았다 다시 펼치는 공자의 손때가 묻어 있다.

‘공부자성적도’에도 ‘위편삼절’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림 중앙에서 공자는 책을 펼쳐서 보고 있다. 곁에 선 제자들도 스승을 따라 책을 보고 있다. ‘위편삼절’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기존의 ‘공자성적도’의 묘사방식을 충실히 따랐다. 액자 같은 사각 병풍 앞에 주인공인 공자를 배치한 점, 역원근법을 적용한 탁자, 상서로운 구름이 흘러 다니는 공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죽간 대신 종이책이 등장하는 등 시대에 대한 고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점도 다른 ‘공자성적도’와 마찬가지로 눈에 거슬린다. ‘위편삼절’은 가죽끈이 포인트다. 가죽끈이 끊어지는 모습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죽간 대신 종이책이 그려졌다. 낡은 가죽끈의 이미지가 들어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시대의 풍속과 역사적인 지식 없이 무조건 재주만으로 성인의 자취를 살려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공자가 가죽끈이 세 번씩 끊어지도록 읽은 책은 무슨 책이었을까. ‘주역(周易)’이다. ‘위편삼절’ 왼쪽 위에는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후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다는 내용과 함께 그 대신 ‘주역’을 연구하는 데 전념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단(彖)’ ‘상(象)’ ‘계사(繫辭)’ ‘설괘(說卦)’ ‘문언(文言)’을 지었으며, 너무 많이 읽어서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했다. 이어 공자는 “앞으로 수년 동안 ‘주역’만을 연구한다면 크게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림은 공자가 ‘주역’의 ‘역전(易傳)’ 부분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실제로 ‘논어’의 ‘술이’와 ‘사기’의 ‘세가’에는 공자가 ‘주역’을 공부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역전’은 대체로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에서 한(漢)대 초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 이런 주장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 그렇다 해도 공자가 당시까지 내려오던 세 가지 역 중에서 ‘주역’을 선택해 체계를 갖춘 것은 사실이다. 학계의 의논과는 무관하게 ‘공부자성적도’에는 공자가 ‘주역’에 관심을 가진 내용이 하나 더 들어가 있다. ‘독역유감(讀易有感·주역을 읽으며 탄식하다)’이 그것이다. 즉 공자가 ‘주역’의 ‘손괘(損卦)’와 ‘익괘(益卦)’를 읽다가 탄식하는 내용이다. 자하가 탄식하는 이유를 묻자 공자는 “줄어드는 것은 늘어나기 위함이고, 늘어난 것은 다시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탄식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학문이 높을수록 몸가짐은 더욱 겸허해야 하는데’ 만약 자신을 덜어내어 겸허하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이 끊임없이 늘어난다는 것이다’는 뜻이다.

‘위편삼절’과 ‘독역유감’은 공자가 육경의 하나인 ‘주역’을 공부하고 정리하는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자세는 단지 ‘주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머지 오경에도 전부 해당된다. ‘시경’ ‘서경’ ‘역경’은 당시에 이미 고전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잘 알려진 책이었다. 이 삼경은 비록 통일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형태였지만 글로 쓰여진 책이었다. 그러나 예악은 책의 형태로 전해지기보다 말과 행동, 몸짓과 실천을 통해 전승된 학문이었다. 공자는 그 두 가지를 전부 정리했다. 기록된 자료든 구전에 의한 자료든 이런 자료를 정리하고 체계를 세우는 일은 당대의 학문 수준을 판단하고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굳이 기존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 내용을 ‘시경’을 정리한 목적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공자는 ‘논어’ ‘위정’에서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생각에 사악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시경’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생각 중에는 좋은 생각도 있고 나쁜 생각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한다. 이때 ‘시경’과 같은 좋은 책(가르침)은 자칫 옆길로 빠져나갈 수 있는 생각을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이 교육이다. 공자가 말한 ‘사무사’는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모든 작업이 공자의 학당인 ‘행단(杏亶)’에서 이루어졌다. 즉 공자는 하루 종일 살구나무가 핀 단상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제자들과 함께 ‘시경’을 정리하고 ‘서경’을 전술했으며, ‘예기’를 편찬하고 ‘악기’를 교정했으며 ‘주역’을 찬술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편년체로 된 노나라의 역사책인 ‘춘추’를 기록했다. 결국 공자가 만세의 사표가 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학문을 향한 열정과 부지런함 그리고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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