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량, ‘월야산수도’, 1744년, 49.2×81.9㎝, 종이에 연한 색, 국립중앙박물관
김두량, ‘월야산수도’, 1744년, 49.2×81.9㎝, 종이에 연한 색, 국립중앙박물관

한시름 놓았다. 이제 거둘 일만 남았다. 행여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질까 태풍으로 사과가 떨어질까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튼실하게 여문 벼와 밤, 대추와 토란을 수확하기만 하면 된다. 한 해의 수고로움을 아낌없이 거둬 들일 수 있는 가을. 가을의 중심에 한가위가 들어있다. 한가위는 음력 8월 중추(仲秋·15일)로 추석 또는 가배(嘉俳)라고 부른다. 농촌에서는 1년 중 가장 큰 명절로 친다. 사람들은 이날 닭고기, 막걸리 등으로 이웃끼리 어울려 배불리 먹고 흥겹게 논다. 조선 정조 때의 문신 김매순(金邁淳)이 쓴 ‘열양세시기’에는 ‘아무리 벽촌의 가난한 집에서라도 예법에 따라 모두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찬도 만들며, 또 온갖 과일을 풍성하게 장만한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 같기만 하라’고 했다. 순조 때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는 더 구체적이다. 햅쌀로 술을 빚고 송편을 만들고 시루떡을 만든 풍경 외에 인절미를 만드는 모습까지 적혀 있다. 즉 찹쌀가루를 쪄서 떡을 만든 후 볶은 검은콩이나 누런 콩가루와 참깨를 묻히는데 이것을 인절미라 한다. 찹쌀가루를 쪄서 계란 형태의 둥근 떡을 만들고 삶은 밤을 꿀에 개어 바른 밤단자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한가위의 풍성함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기야(箕野) 이방운(李昉運·1761년∼?)이 그린 ‘빈풍칠월도’다. 그림 중앙의 논에서는 여섯 명의 건장한 남정네들이 벼를 벤다. 한 남자는 묶은 볏단을 소 잔등에 실어 나르고 버드나무 곁에서는 아낙네가 지붕 위의 박을 따느라 분주하다. 논 뒤쪽 나무 아래서는 세 남자가 머루와 아가위를 먹고 울타리 친 초막에서는 아욱과 콩을 한 솥 가득 삶는다. 마루에 앉아 대추 따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노인네에게 봄에 빚은 술을 대접한다. 자연의 절기에 맞춰 농사짓고 사는 백성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추석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 유래에 대해서는 고려 때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명절인 만큼 한가위 차례상에 올리는 과일도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지역에 따라 경제 사정에 따라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빠뜨려서는 안 되는 필수품목이 있다. 감과 밤과 대추다. 밤은 나무가 아무리 큰 거목이 되어도 처음 땅속에 심었던 씨밤은 절대로 썩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런 밤처럼 사람 또한 근본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차례상에 올린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위패를 밤나무로 만든 이치도 그와 같다. 대추는 꽃 피는 자리마다 열매가 열린다.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었으면 자손을 많이 낳아 집안을 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요즘처럼 출산율이 낮은 사회에서는 더욱 필요한 과일이 대추다. 감은 사람이 배우고 가르침을 받아야 사람이 된다는 뜻을 되새기기 위한 과일이다. 감씨를 심어 나무가 자라면 그 나무는 감나무가 아니라 고욤나무가 된다. 감나무를 심어 3~5년이 지난 다음 반드시 원래의 감나무를 접붙여야 감이 열린다. 배우고 노력해야 진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

‘빈풍칠월도’는 한가위를 표현한 그림이 아니다. 경직도(耕織圖)다. 경직도는 농촌에서 각 계절별로 월령(月令)에 따라 경직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을 일컫는다.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봄부터 땀 흘리는 여름과 추수하는 가을,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까지 다양한 노동의 현장을 보여준다. 그중 오늘 감상한 6면은 가을 풍경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모델은 추석이 아니다. ‘시경(詩經)’의 ‘빈풍칠월(豳風七月)’이다. 주공(周公)이 어린 조카 성왕(成王)으로 하여금 백성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게 하기 위해 지은 시로 모두 8연으로 되어 있다.

이방운, ‘빈풍칠월도’ 6면, 25.6×20.1㎝, 종이에 연한 색, 국립중앙박물관
이방운, ‘빈풍칠월도’ 6면, 25.6×20.1㎝, 종이에 연한 색, 국립중앙박물관

‘빈’은 주(周) 나라의 옛 이름이고 ‘풍(風)’은 그 나라의 민요를 수록한 것이다. ‘빈풍칠월’은 유교적인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위정자의 애민사상을 읽을 수 있는 시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빈풍칠월도를 모범으로 한 경직도가 다양하게 그려졌다. 한가위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이 없어서 ‘빈풍칠월도’로 대신했지만 그 안에서도 충분히 한가위 풍속을 짐작할 수 있다. 4절일 중 가장 큰 명절로 여겼다는 추석이 왜 그림으로는 많이 그려지지 않았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추석뿐만이 아니다. 설날도 마찬가지다.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진 김홍도(金弘道)·김득신(金得臣)·신윤복(申潤福) 중 그 누구도 설과 추석 관련 그림을 남기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 대신 추석과 관련해 달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김두량(金斗樑·1696~1763)이 그린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가 대표적이다. 계곡물이 흐르는 숲 속에 뼈대가 드러난 나무가 서 있고 안개가 흐른다. 안개는 거친 필치의 나무를 부드럽게 감싸는 것 같다. 안개 위에 달빛까지 비춰 스산한 가을밤의 정취가 더욱 운치 있다. 모든 수고로움을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본 넉넉한 가을밤의 보름달이다. 좌측 상단에 ‘갑자년에 김두량이 그렸다(甲子仲秋金斗樑寫)’라고 적어 놓았다. 김두량이 48세 되던 1744년 추석에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달은 꼭 추석이 아니라도 보름마다 뜬다. 그런데 왜 꼭 한가위 보름달을 고집할까. 조선 중기의 문인 이식(李植)의 문집 ‘택당집(澤堂集)’에는 ‘중추의 달이야말로 사해(四海) 어디에서 보든 흐리고 밝은 것이 똑같고, 1년 중 그 달빛이 가장 밝고 환하기 때문에 완상(翫賞)하는 절일로 삼게 된 것’이라 적혀 있다. 또 ‘오행(五行) 가운데 금(金)의 정기(精氣)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날이라고 하여 도사(道士)들이 이날부터 내단(內丹)을 단련하는 까닭에 도가(道家)에서도 이날을 숭상’한다고 설명한다. 중추절이야말로 달맞이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는 뜻이다. 그 때문인지 달을 감상한 ‘완월도(翫月圖)’나 떠오르는 달을 보며 거문고를 타는 ‘탄금도(彈琴圖)’ 등은 심심치 않게 제작됐다. 모두 사대부들의 고아한 삶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다. 여기에 왕유(王維), 이태백(李太白) 등 달과 관련된 멋진 시를 읊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원인도 한몫했다. 달은 잡다한 세상의 소음을 적당히 덮어 주지 않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한가위는 어느 쪽일까. 잘 수확한 한 해 농사를 확인하는 농민의 심정일까. 아니면 달밤에 한 동이 술을 옆에 두고서 천지자연의 변화 과정을 체득하는 철학자의 심정일까. 이도저도 아닐 것이다. 생업과 여유라는 대척점에 선 두 그림 사이에 우리의 삶이 들어있다. 그 소소한 삶의 고민을 전부 드러낼 수 없어 추석 그림이 없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잃고 상처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다 끌어안을 수 없음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날이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날이라면 그것은 명절(名節)이 아니라 염절(厭節)이다. 명절을 명절로 만드는 것. 그것이 진짜 명절이고 한가위다. 그것이 진짜 차례상 위에 밤·감·대추를 올리는 행위이고 달맞이 행사다.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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