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문, ‘목양취소’, 종이에 연한색, 41.5×30.8㎝, 간송미술관
이인문, ‘목양취소’, 종이에 연한색, 41.5×30.8㎝, 간송미술관

올해는 을미년(乙未年), 양의 해다. 양은 십이지(十二支)의 여덟째 동물인데 다른 동물에 비해 그림은 많지 않다. 12지의 용이나 호랑이, 소나 말 그림은 흔한 반면 양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양을 가축으로 잘 키우지 않기 때문이다. 양이 온순한 동물이라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은 탓도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 인심이 그림의 세계에도 반영됐다.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觀道人·‘늙은 소나무 흐르는 물을 마음 담는 이’라는 뜻의 호) 이인문(李寅文·1745~1824)이 그린 ‘목양취소(牧羊吹簫)’는 녹음이 한창 무르익기 시작한 늦봄에 소년이 단소를 불며 양을 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강가의 수양버들이 물기를 빨아들이는 봄날, 소년이 높은 바위에 걸터앉아 단소를 분다. 양들은 주인 곁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당시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원 풍경이다. 신석정이 ‘소년을 위한 목가’에서 ‘우리 양들을 노리던 승냥이 떼도 가고/ 시방 우리 목장과 산과 하늘은/ 태고보다 곱고 조용하구나’ 하는 경지를 보는 듯하다. 평범한 일상도 그곳에 깃들어 사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신선이 사는 별유천지(別有天地)로 바뀐다. 화면 좌측에는 당대의 감식안이었던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글이 적혀 있다. ‘네가 황초평의 후신이 아닌가.’

도교·불교와 관련된 소재를 다룬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에는 양과 관련된 신선 황초평(黃初平)이 등장한다. 황초평에 관한 내용은 중국 진(晋)나라의 갈홍(葛洪)이 지은 ‘신선전(神仙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황초평은 진대(晋代)에 살았던 양치기였다. 그가 15세 되던 날 그의 성품이 매우 착한 것을 본 신선이 금화산(金華山)에 데려가 신선도를 가르쳐 주었다. 40여년이 지나서 그의 형이 아우를 찾아 금화산에 가 보니 아우는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형은 동생에게 양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황초평이 흰 돌을 수만 마리의 양으로 둔갑시켰다. 그래서 황초평은 채찍을 들고 양을 몰고 가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진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내용은 당시 사람들의 불로장생에 대한 염원이 반영되어 있다. 양을 몰고 가는 황초평의 모습은 세상사에 초연한 목가적 삶의 희구를 담고 있다. 김홍도도 황초평이 양을 몰고 가는 그림을 남겼다.

그림에 비해 양과 관련된 속담은 많다. 양은 온순함을 넘어 고지식하다. ‘양띠는 부자가 못 된다’라는 속담은 그런 양의 속성을 반영한다. 수많은 동물의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피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양의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양의 탈을 쓴 이리’라는 표현은 악을 선으로 포장한 위선자를 가리킨다. 초식동물인 양이 육식동물인 이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풀을 뜯어먹는 양의 입가에 피가 묻었다고 생각해 보라.

양두구육(羊頭狗肉)에도 양이 들어간다. 양의 대가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훌륭해 보여도 속은 변변찮을 때 쓰는 말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경공(景公)은 궁녀들에게 남장을 시켜놓고 즐기면서 백성들에게는 이를 금지시켰다. 이 모습을 본 재상 안자(晏子)는 경공을 직접 대놓고 비난할 수 없어 ‘현양두(懸羊頭) 매마육(賣馬肉)’이라 직언했다. 양머리를 걸어놓고 말고기를 판다는 뜻인데 양두구육은 여기서 유래했다. 별 볼일 없는 물건을 겉만 그럴싸하게 꾸며놓을 때 쓰는 ‘양질호피(羊質虎皮)’도 같은 뜻이다. 특이한 것은 반대되는 동물은 개, 말, 호랑이 등으로 계속 바뀌는데 양은 초지일관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양을 대체할 만큼 착한 동물이 없기 때문일까. 이래저래 죄 없는 양은 사나운 동물이나 사기꾼들의 농간에 이유 없이 끌려다닌다. 너무 착하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다.

양과 관련된 좋은 속담도 없는 것은 아니다. ‘겉은 범이고 속은 양이다.’ 겉으로는 험상궂고 무섭게 생겼지만 마음은 온순하고 착한 사람을 지칭한다. 양은 삼국시대 이후 능묘의 호석(護石), 고분벽화, 석탑과 부도, 동경과 금속 공예품으로도 쓰인다. 사악함을 물리치고 명복을 비는 뜻을 지녔기 때문이다. 순하고 선한 동물이 악하고 독한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는 뜻이다. 순한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이 무서운 이치와도 상통한다. 양은 늙은 어미 양에게 젖을 빨리며 봉양한다. 양이 효(孝)를 상징하게 된 배경이다.

양의 한자어 ‘羊’은 갑골문에서 숫양을 정면에서 본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다. ‘羊’이 들어간 한자어는 모두 좋고 귀한 길상적 의미가 담겨 있다. 아름다움(美), 상서로움(祥), 착함(善) 등에는 모두 양(羊)이 들어간다. 그래서 크게 좋다는 의미의 ‘대길상(大吉祥)’은 ‘대길양(大吉羊)’이라 썼다. 상서롭지 못한 기운을 없애주는 ‘벽제불상(辟除不祥)’을 ‘벽제불양(辟除不羊)’이라 쓴 이유도 같은 의미에서다.

양에게 이렇게 좋은 의미가 깃들이다 보니 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이었다. 꿈 속에서 양을 잡았는데 뿔과 꼬리가 떨어져 나갔다. 괴이하게 생각한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에게 해몽을 의뢰하니 그가 왕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 ‘羊’에서 뿔에 해당하는 위의 두 점과 꼬리에 해당하는 삐침(ㅣ)을 빼면 왕(王) 자가 되지 않는가. 이성계가 해몽대로 왕이 된 이후 양 꿈은 재물, 행운, 성공을 가져다 주는 길몽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양은 제사를 지낼 때 가장 먼저 희생 제물로 지목된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동서양 공통이다. 양을 얼마나 제물로 많이 바쳤으면 아예 양을 지칭하여 ‘희생양’이라고 했을까. 양은 천성이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이 칼을 들이대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순하다는 이유만으로 억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목숨을 빼앗겨야 하는 희생양은 약하고 억울한 사람의 대명사다. 공동체의 비난을 대신 뒤집어쓰고 ‘속죄양’으로 희생된 사람과 제물로 바쳐진 희생양과 같은 신세다.

올해는 양처럼 착한 사람들이 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힘없고 ‘빽’ 없는 서민들을 제물로 바치는 잔인한 해가 되지 않기를 기원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두 갑자 전 1895년에는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했다. 을미년을 출발하여 병신년까지 걸어가는 양의 걸음걸이가 ‘죽으러 가는 양의 걸음’처럼 힘없고 지치지 않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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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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