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묘비에 새겨진 절창(絶唱) 하나로 세계인의 가슴속에 영원한 자유인으로 숨 쉬고 있는 거인. 올가을은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되는 가을이다. 그는 10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육십갑자의 세월이 흘렀다. 그의 영혼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오매불망 짊어지고 다니던 조국 그리스는 이제 좀 내려놓으셨는가? 자유란 놈을 찾긴 했을까? 부디, 하늘나라에선 무량한 안식 누리시길…. 130여개국 지부를 거느린 국제문학단체 ‘카잔자키스 친구들’의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를 친구로 둔 매니아들의 조직을 운용하는 비영리 공동체다. 이 단체에서 그의 서거 60주기를 맞아 특별학술행사를 연다. 오는 12월 1일 중국 베이징대학 국제문화센터가 주관을 하고 세계의 친구들이 그곳에 모여 선생을 기리며 ‘카잔자키스學’을 펼친다. 이날 ‘한국 카잔자키스 친구들’도 베이징으로 날아가 함께할 예정이다. 현재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유재원 교수가 좌장으로 기조세션을 맡고 심아진 소설가도 발제를 할 것이다.

나는 카잔자키스를 20세기 ‘유랑(流浪)의 성자’라고 칭한다. 척박한 환경의 크레타섬에서 태어났지만 세계를 무대로 순례길에 나섰다. 그리고 세계사적 격동기였던 ‘제1·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살아온 증인이기도 하다. 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의 노회(老獪)한 눈길은 쉬지 않았다. 예언자적 영기(靈氣)를 지닌 정열을 집필에 쏟아부었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과 신(神)의 경계에 관해 의문을 품었다. 세계 곳곳의 굴곡진 종교역사 현장을 답사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죽는 날까지도 그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역마살 낀 그의 삶을 따라가 보면 인생이란 순례길이며 숨결 닿는 곳이 성전이었다. 숨 멈춘 곳이 생(生)의 완성지점이었다.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떠나 길에서 병을 얻었다. 그해 10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그해 여름 아시아 방문 중 중국 광저우에서 예방접종을 했던 것이 화근이 됐다. 백혈병을 앓았던 그의 몸에 아시아독감이 급습했던 것이다.

그의 서거 60주기를 돌아보며, 나는 다시 두 권의 책을 꺼냈다. 한국의 애독자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그리스인 조르바’와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 ‘전쟁과 신부’(원제는 ‘형제 살해자들’)이다. ‘인간 본질과 종교에 대한 탐구’가 그의 소설적 주제였다. 카잔자키스의 소설은 언제나 이 주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종교란 인간의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란 물음을….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도 그 연장선상의 소설이다. 세파에 휘둘리며 생의 진리(자유·自由)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극과 극의 기질 차이를 보이는 작중인물을 내세워 인간 내면에 자리한 속물근성과 지성의 가면 뒤에 숨은 비겁함과 옹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것, 그들이 시대적 난항(難航)을 헤쳐 나가는 방식과 타고난 기질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 젊은 날 자유의지 하나로 펄펄 날던 한 인간의 생의 끝자락에서 그의 소회를 들어보는 것도 카잔자키스다운 소설 쓰기 방식이었다.(알렉시스 조르바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창밖을 내다보며 큰소리치다가 창틀을 붙들고 죽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이 있다.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크레타섬에서 케이블장치가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바로 그 장면에서 작가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인간의 잔머리로 최적의 기울기를 계산하여 세운 기계장치가 첫 가동시험에서 참패당하는 것! 인생에서도 그렇다. 잘해 보려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건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는 허탕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약삭빠르게 세상물정을 익혀온 조르바의 경험치나 책상머리에서 얻은 버질의 알량한 지식이 깡그리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기울기의 변곡점(變曲點)을 잘못 짚어, 가차 없이 떠밀리는 불완전한 정점을 보여준 것이다. 힘의 균형에 빗대어 ‘삶의 기술’을 말하려 한 것이다. 카잔자키스는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이 작품을 썼다. 그런 만큼 인생에 달관하였고 ‘삶의 지혜’를 꿰뚫었을 나이였다. 작가의 노회한 시선으로 인간 안에 내재한 코나투스(conatus), 조절 방식을 슬쩍 문학적으로 던져놓았던 것이다.

內戰의 상처를 딛고

그리스의 근현대사는 우리나라 역사와 닮은꼴이다. 우리가 겪은 6·25전쟁처럼 그들도 형제끼리 물어뜯고 도륙했던 동족상쟁(1949년)을 치렀다. ‘전쟁과 신부’는 이 내전의 실화를 그린 소설이다. 공산주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던 당시 정치적 이념에 휘말려 반대편을 악마로 몰아세웠던 광기의 시대를 다룬 소설이다. 탐욕스러운 수도사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던 야나로스 신부의 행위는 사회주의 메시아가 도래한 것처럼 희망적으로 보인다. 민중 위에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메시아. 반란군과 정부군이 좌우파로 갈려 살육하는 전장 한가운데에 사제인 야나로스가 서 있다. 사제는 ‘민족의 화합’을 위해 양쪽 진영을 오가며 설득작전을 펴지만 결국은 반란군 지도자이자 그의 아들인 드라코스 대장과 최후 단판을 붙게 된다. 아들의 명령으로 빨치산 대원이 쏜 총탄에 피를 흘리며 야나로스가 쓰러진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레닌에게 도취되었던 공산주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이 따끔거렸다. 동병상련의 환지통(幻肢痛) 같은 것. 그리스 내전보다 훨씬 더 참혹했던 동족상잔을 겪은 우리는 왜 세계적 걸작이 나오지 않는 걸까. 그것은 종식된 전쟁과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차이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카잔자키스는 행복한 작가였다. 내전이 종식되고 ‘통일된 민족’을 바라보며 사상검증까지 끝낸 상태에서 이 소설을 쓸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아직 멀었다. 아물지 않은 분단 70년의 상처, 시퍼렇던 이념도 열정도 이젠 다 낡고 녹슬어 늪지대에 빠져버렸다. 남북의 어느 작가든 진절머리 나는 이 대치 상태는 깊이 병들어가고 있는 시간일 뿐이다.

끝으로, ‘한국 카잔자키스 친구들’ 모임을 소개하고 싶다. 이 모임은 2008년 봄 어느 잡담 자리에서 결성되었다. 아테네대학 박사 출신인 유재원 교수를 비롯하여 몇몇 작가, 교수, 그리고 애독자가 모여 창립대회를 가졌다. 해마다 ‘이야기 잔치’란 이름으로 100여명의 매니아들이 모여 10년 동안 학술행사를 이어왔다. 올해는 ‘서거 60주기 특별학술대회’ 베이징 행사로 대체하고 내년 5월에 유재원 교수가 완역한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고 풍성한 이야기잔치를 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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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숙 소설가·전 한국 카잔자키스 친구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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