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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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좋은 냄비보다는 양은냄비가 적격이다. 냄비에 물을 적당량 넣고 가스불을 켠다. 물이 끓을 동안 라면봉지를 뜯고 분말수프를 분리해 놓는다. 물이 끓어도 10여초는 더 끓게 놔두었다가 분말수프를 먼저 넣는다. 차가운 분말수프가 들어가자 냄비 속에 거품이 인다. 잠시 후 수프가 들어간 물은 다시 맹렬하게 끓는다. 라면을 냄비 안에 넣는다. 냄비가 작아 한 번에 안 들어간다. ‘라면을 잘라 넣을 걸.’ 후회가 든다. 젓가락으로 어떻게든지 라면을 냄비 안에 구겨 넣는다. 이제는 면을 쉼 없이 휘저을 차례다. 라면봉지에 남은 부스러기는 이미 내 입에 들어간 지 오래다. 라면 부스러기를 씹으며 면을 저으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는다.

라면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간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라면 한 가닥을 들어 입에 넣어본다. ‘알 단테’ 약간 덜 익었지만 지금이 뜸을 들이기에 가장 적기다. 달걀이나 파를 넣을까 잠깐 망설였지만 오늘은 아니다. 라면 그 자체의 맛을 느끼고 싶다. 가스불을 끄고 면을 한 차례 크게 저은 후 냄비째 식탁으로 옮긴다. 아! 김치가 빠졌다. 겉절이, 총각김치, 깍두기, 김장김치 등 종류는 상관없다. 단무지만 아니면 된다. 라면은 단무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완벽한 라면이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돈다. 다시 한 번 면을 휘저은 다음 김치와 더불어 맛있게 먹는다. 라면은 끝까지 시간과의 싸움이다. 대화를 나누며 먹기에는 라면의 성질이 너무 급하다. 국물을 머금어 불기 시작한 라면은 풍미를 잃는다. 3분 이내에 면발을 해치워야 꼬들꼬들하고 간이 잘 밴 라면을 먹을 수 있다. 어느새 라면 면발의 끝이 보인다. 비로소 적당히 식은 냄비를 두 손으로 잡고 국물을 들이켠다. 소주를 마신 것도 아닌데 ‘커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지금 라면 하나를 먹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저절로 찬밥을 찾게 된다. 보온밥통에 있는 더운 밥은 국물의 맛을 살리지 못한다. 아! 찬밥이 없다. 아쉽지만 이것으로 오늘의 야식만찬을 마쳐야 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는 서울의 산동네다. 동네에 있는 몇 집을 지나면 이제는 도시에선 보기 힘든 구멍가게가 있었다. 우리 집은 그 구멍가게에 외상장부를 쓰면서 생활을 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콩나물을 사러 가면 신문지로 고깔을 만들어 콩나물 대야에 있는 콩나물을 가득 주었다. 하나라도 흘릴세라 신문지 고깔을 소중히 여며 들고 나서면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태호네’라고 써진 우리 집 외상장부를 내밀며 ‘○월 ○일 콩나물 50원’이라고 써 있는 것을 나에게 확인시켰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신용카드사 역할을 일개 구멍가게가 한 셈이다. 그렇게 적힌 장부는 아버지의 월급날이 되면 엄마가 가서 정리하고 오셨다. 그때마다 손에는 라면 몇 개가 들려 있었다. 그때 라면 한 개의 가격은 50원이었다. 떡볶이집에서 10원어치를 팔고, 엄마에게 ‘10원만~’을 달고 산 나에게 라면은 너무나도 비싼 음식이었다. 당연히 자주 먹을 수 없는 데다가 불을 만질 수 없으니 그저 엄마가 끓여주실 때만을 기다렸다. 당시 우리 집에선 닭도 키우고 있어 당연히 라면에는 항상 달걀이 들어갔다. 일요일 3대가 모인 자리에 달걀을 넣고 끓인 라면의 맛은 어린 나에게도 굉장한 호사로 느껴졌다. 물론 달걀덩어리와 대부분의 면발은 남자 어른들 몫이었다. 그나마 엄마는 국물에 밥을 말아 드셨던 것 같다. 아마 그런 기억들이 내가 라면을 소울푸드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무엇을 먹어도 배고팠던 시기였다. 사교육이 전면금지된 시대를 지낸 나는 도시락을 두 개씩 가지고 다녔다. 점심과 저녁을 먹었지만 학교에서 돌아온 늦은 밤에는 항상 배가 고팠다. 그 배고픔은 당연히 라면으로 달랬다. 친구들이 모이면 커다란 들통에 1인당 2개씩의 라면을 한꺼번에 끓였다. 젓가락으로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의사국가고시를 준비하면서 우리 어머니는 다시 도시락을 쌌다. 학교 밖에 나가서 먹을 수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고 밖에 나간 김에 유혹에 빠져 노는 시간도 많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부탁한 것이다. 식은 도시락을 먹는 데는 라면만큼 좋은 것이 없다. 반찬도 김치 한 가지면 충분하다. 학교라서 라면을 끓일 수는 없지만 물을 데워 먹는 컵라면은 가능했다. 간편식이라는 컵라면은 사실 라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꿩 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의 수험생 시기를 잘 지켜준 고마운 친구다.

의사가 된 후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에는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잦았다. 항상 배수의 진을 치고 환자를 돌봐야 하는 대학병원에서 때 맞춰 식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 아직도 내 내과 동기들은 서로를 ‘전우’라고 부른다. 지금이야 24시간 야식배달이라는 우리나라만의 문명이 있지만 당시에는 10시가 넘어가면 끼니거리를 찾기 힘들었다. 그때도 병원 식당에서 10시에 라면을 끓여주었다. 한 번에 20~30개를 끓인 라면이었지만 오랫동안의 솜씨가 있어 맛도 좋았다. 마냥 라면만 끓일 수는 없기 때문에 늦게 가면 그나마도 못 먹었다. 여유가 있으면 9시55분경 식당에 앉아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동료들과 환자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그마저도 일이 바쁘면 그림의 떡이었다. 군의관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중 40㎞ 행군을 마치고 미지근한 물에 컵라면을 불려 먹었던 것도 기억 난다.

이젠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나, 맛이 있어서 라면을 먹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일이 잘 안 풀릴 때, 옛 생각이 날 때, 새로운 각오를 다질 때 나는 또다시 라면을 끓인다.

송태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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