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프랜시스 베이컨.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 초판.
(왼쪽부터) 프랜시스 베이컨.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 초판.

“기술에 의해 그 종류의 일반적인 것 이상으로 크게 하든가… 반대로 작게 하든가 발달을 멈추게 할 수도 있소. 또한 보통 종류 이상으로 다산하도록 하거나, 반대로 출산을 억제하여 늘지 않도록 하기도 하오. 또 색깔이나 형태나 활동이나 그밖의 것을 갖가지로 다르게 변화시키기도 하오.”

오늘날 이런 이야기는 진부하게 들린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년 전에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다. 그는 사후에 발간된 ‘새로운 아틀란티스’(New Atlantis·1627)를 통해 과학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그의 생각을 웅변해준다.

본래 ‘아틀란티스’는 플라톤이 그의 저작에 언급한 전승(傳承) 속의 낙원이다. 하지만 그 섬나라는 탐욕을 부리다가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플라톤은 이 전승을 교훈적 목적으로 인용했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베이컨은 과학기술을 통해 번영을 이룩하되, 탐욕은 멀리하는 도전적 이상향을 구상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아틀란티스’이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태평양을 표류하던 주인공 일행이 ‘평평하게 보이는 뭍’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다행히 이 섬나라는 기독교를 믿는다. 신앙을 고리로 주인공 일행과 그곳 관리들이 우호적으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일행은 영빈관으로 안내되어 묵으면서, 이 나라가 상식이 통하고 자유가 향유되며 물자가 넉넉한 낙토(樂土)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왕국의 빛’이라고 불리는 솔로몬관(館)에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국가 최고 연구기관이다. 이 기관은 거대한 인공동굴을 가지고 있다. 큰 것은 깊이가 지하 120미터, 길이가 3마일 이상이나 된다. 또한 지형에 따라 다양한 탑도 있다. 큰 것은 높이가 0.5마일에 이른다. 그런 시설에서 각종 실험과 관측이 행해진다.

또한 그들은 세계 각지로 연구원들을 파견하여 학문·기술·제작물·발견에 대한 지식을 수집한다. 그렇게 수집한 기술정보를 가공하고 정리하되, 자체 검열제도를 통해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 아울러 질병, 재해 등에 대해서도 예보를 하고 방지책을 제시한다. 가치 있는 발명이 이루어질 때마다 발명자의 상(像)을 세운다. 이 왕국에서 과학자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이처럼 주인공 일행이 솔로몬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이 책은 아쉽게도 미완(未完)인 상태로 중단된다. 하지만 전후 문맥에 비추어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과학기술을 적절히 활용하여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는 낙원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400년 전에 베이컨이 과학의 창(窓)을 통해 오늘날의 놀라운 번영을 예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오늘날의 과학적 발전을 바탕으로 600년 앞을 내다본 또 다른 예언이 있다. 바로 올더스 헉슬리(1894~1963)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1932)이다. 이 신세계는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시설에서 T형 자동차를 양산하기 시작한 1908년을 원년(元年)으로 삼는다. T형 자동차는 과학기술을 통해 대량소비시대를 연 상징적 상품이었다.

포드 기원 632년. ‘런던 중앙 인공부화 및 조절국’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곳은 대량 인공수정을 통한 맞춤형 인간 생산공장이다. 사람은 애초에 계급은 물론, 직업을 정해서 생산된다. 특히 하층계급은 굳이 개성을 가질 필요가 없는 만큼 난자를 여럿으로 분열시켜 대량 쌍둥이로 만든다. 또한 장미와 책에 다가가면 고압전류로 쇼크를 일으켜 본능적 증오를 심어준다. 이런 조작을 반복 실시하면 평생 자연과 지식을 멀리하게 된다.

대부분의 여성은 아예 태아 때에 난임처리된다. 일부 여성은 난자 채취를 위해 수태 기능이 남겨져 있지만 개인의 임신이나 출산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공수정을 통해 시험관에서 태아가 충분히 자라면 마개를 따는 일이 곧 탄생이다. 따라서 부모형제 개념이 없다. 남녀가 만나면 스쳐가는 쾌락만 있을 뿐, 그 이상의 깊은 사랑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는 세계회장과 대륙별 지역회장이 다스리는 거대한 과학제국이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 과학적으로 ‘세심하게’ 조절된다. 각 계급마다 각각 적당한 일거리·먹거리·오락거리가 주어진다. 그래도 생기는 불안이나 스트레스는 ‘소마’라는 약이 해결해준다. 그것은 국가가 제공하는 공인된 묘약이다.

한편, 미국 뉴멕시코주에는 전기 울타리로 격리된 ‘야만인 보존구역’이 있다. 한 여성이 남성과 그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실수로 임신을 하고 만 것이다. 거기서 아들 존을 낳고, 야만인들 틈에서 어렵게 살아간다. 나중에 그곳으로 여행을 간 어떤 남녀가 모자(母子)를 발견한다. 존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 멋진 신세계!”라고 외친다.

그들은 상부의 허락을 받아 모자를 ‘멋진 신세계’로 데려온다. 야만인 존은 일약 유명인사가 된다. 이 ‘희귀한’ 인물을 만나기 위해 명사들이나 기자들이 몰려든다. 그와 그를 구출한(?) 여성은 서로 호감을 갖는다. 그러나 서로를 갈구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존은 ‘멋진 신세계’의 비인간성에 절망하여 결국 자살하고 만다.

베이컨은 400년 전에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통해 유토피아를 예언했다. 실제로 그동안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엄청난 편익을 제공했다. 반면, 지난 세기에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전망했다. 그의 음울한 예언은 거의 100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처럼 과학의 미래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몇백 년 동안 과학은 완만하게 발전했다. 주로 편익만 증대시키고 부작용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발전이 가속화하고 기술이 첨단화하면서 순작용과 부작용이 서로 뒤엉켜 분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인간의 탐욕까지 보태졌다. 이런 와중에 헉슬리가 600년 후로 예상한 인간생산공장은 불과 100년도 안 돼서 당장이라도 실현가능하게 되었다.

과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만 말한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인간의 몫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않은 채 과학기술을 이용해 이미 신의 영역을 허물기 시작했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인간을 ‘신이 된 동물’이라고 부른다. 신으로 승격이냐, 파멸이냐. 지금 인간은 종(種)의 운명을 가를 시험대를 너무도 쉽게 오르고 있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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