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한비 초상. (우)‘한비자’ 표지.
(좌)한비 초상. (우)‘한비자’ 표지.

동양에서는 지난 2000여년 동안 유교가 정통사상으로 군림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상과 학문이 이단(異端)으로 몰려 배척되고 말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한비(韓非·BC 280~233)의 법가사상이다. 그의 생각은 ‘한비자(韓非子)’에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한비자’라는 책명부터 논쟁적이다. 흔히 유명인에게는 성씨에 자(子)를 붙였는데 ‘자’는 ‘선생’이란 뜻이다. 또한 이것을 그 사람의 책명으로 삼기도 했다. 한비의 책도 처음에는 ‘한자’라고 불렸다. 하지만 송나라 때 유학자 ‘한유(韓愈)’가 ‘한자’라고 불리면서 그의 책은 ‘한비자’로 바뀌고 말았다. 이를 통해 그의 사상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한비자’는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흔히 “제왕은 남이 볼 때는 ‘논어’를 읽고, 혼자 있을 때는 ‘한비자’를 읽는다”고 회자되었다. 이 말은 대립적인 두 고전의 특징을 절묘하게 웅변해준다. 여기서 외유내법(外儒內法)이란 말이 생겼다. 이처럼 한비의 사상은 이단으로 취급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던 것이다.

한비는 한나라의 명문 귀족 출신이다. 그는 조정에 여러 가지 시책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울분을 느끼며 그의 생각을 기록으로 정리한 것이 ‘한비자’이다. 당시 진왕(후에 진시황)이 그의 책에 관심을 보이자, 진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던 한나라는 그를 진왕에게 외교사절로 파견했다. 이때 진왕의 책사(策士)는 순자(荀子) 밑에서 그와 동문수학한 이사(李斯)였다. 그는 진왕과 한비의 밀착을 경계한 나머지, 한비를 모함해 죽였다.

한비는 스승인 순자의 성악설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해를 다투는 인간의 본능을 직시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수단이 바로 법(法)이다. 흔히 법은 물(氵)처럼 막힘없이 흘러가게(去) 하는 것이라고 회자되지만 그것은 오독(誤讀)이다. 여기서 ‘거(去)’는 ‘제거한다’를 의미한다. 즉 법이란 물처럼 평평한 기준을 적용하여 잘못된 것을 가차 없이 제거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글자 풀이야말로 법가사상의 에센스를 보여준다.

물론 그보다 앞서 법가사상이 있었다. 상앙(商鞅)이 대표적이다. 그는 진나라 효공의 신임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변법(變法)을 실시했다. 변법이란 법을 바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대담한 변법을 통해 진나라를 단시간에 부강한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효공이 죽자, 그에게 반감을 품은 기득권층은 그를 붙잡아 사지를 찢어 처단했다.

이처럼 법가는 강력한 법치를 통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한비는 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무릇 군주란 신하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통치술이 있어야 하며, 또한 강력한 권세로 지휘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보다 앞서 신불해(申不害)는 ‘술(術)’을, 신도(愼到)는 세(勢)를 설파한 바 있다. 한비는 각각 논의되었던 법·술·세를 결합해 자신만의 법가사상을 창의적으로 집대성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그는 유가(儒家)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의 견해는 그가 인용한 우화에 잘 드러나 있다. 어느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별안간 토끼가 달려와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를 들이받고 죽었다. 그 이후로 농부는 농사를 포기하고 나무 그루터기만 바라보며 토끼를 기다렸다. 이것이 유명한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이다. 이를 통해 그는 과거의 좋은 시절을 기준으로 삼는 유가의 태도를 신랄하게 조롱한 것이다.

그는 세상이 바뀌면 법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법을 바꿔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변법사상이다. 이때 법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제정 즉시 널리 공포하여야 한다. 이러한 법의 운영원칙은 한마디로 법불아귀(法不阿貴)이다. 즉 법은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돼야 한다.

한편 그는 군주와 신하를 대립적인 이해 관계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군주는 신하를 다스리는 독특한 통치방법, 즉 술(術)을 터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술이란 “군주가 신하의 능력에 따라 관직을 부여하고, 말한 것을 쫓아서 그 실효성을 추구하며,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력을 가지고 여러 신하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통치술을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일벌백계하라’ 등과 같이 평범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알면서도 모른 척 물어보아 신하의 인물됨을 살펴라’ ‘일부러 반대로 말과 행동을 하여 신하의 반응을 떠보라’ 등과 같이 내밀한 방법까지 망라되어 있다. 그는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마지막으로, 세(勢)란 군주의 통치를 가능케 하는 권력지위를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법과 술을 자유자재로 시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한 자밖에 안 되는 나무라도 높은 산 위에 서 있으면 천 길의 계곡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그것은 나무가 길기 때문이 아니라 서 있는 위치가 높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며 세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처럼 한비는 법·술·세를 결합해 법치의 시너지를 제고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군주가 이 세 가지를 틀어쥐고 신하를 자유자재로 부리면 반드시 부국강병을 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진왕 정(政)은 그의 법가사상을 충실히 실행하여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하고 진시황이 되었다. 이처럼 그의 사상이 그를 죽인 진나라를 통해 꽃을 피운 것은 얄궂은 일이었다.

그의 법가사상은 인간을 이해관계로만 파악했다고 비판된다. 또한 오로지 군주만을 위한 사상이라고 비판된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달리해 보면 오히려 ‘한비자’는 일찍이 보기 드문 현실주의적 탁견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공동체의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법치를 통해 강력한 통치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당시에 그런 주장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흔히 ‘한비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비교되지만 무려 1800여년이나 앞서 있다.

유가는 개인적 수련을 통해 인간적인 고양을 지향했다. 반면, 법가는 법치를 통해 효과적인 사회 시스템을 추구했다. 만약 법가사상이 역사 속에서 생동감 있게 발전했다면 동양사회는 전혀 다르게 변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교의 정통화로 인해 ‘한비자’는 몰래 숨어서 보는 이단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동양에는 인간론만 무성하고 제도론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온통 서양의 제도 속에 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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