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치를 참 좋아한다. 맛이 좋아서 좋고, 우리의 삶을 닮은 것 같아 좋다. 나의 김치 사랑은 배추김치, 총각김치, 물김치, 깍두기, 깻잎김치, 갓김치 등 종류도 상관없다. 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맛이 일품이다. 겨울 내내 싱싱할 뿐만 아니라 숙성되는 정도에 따라 모두 제각각의 맛을 내는 매력이 있어 숙성이 되고 나면 또 그 맛에 홀린다. 나는 숙성된 김치에 돼지고기를 숭숭 썰어 넣어 끓인 김치찌개를 ‘밥도둑’이라고 부를 만큼 사랑한다.

시골 마을 경남 산청에서 나고 자란 나는 김치와 관련된 추억이 유달리 많다. 요즘은 음식이 많아서 못 느끼지만 예전에는 쌀, 김치, 연탄만 있으면 한 해를 난다고 했다. 특히 내 고향 산청은 워낙 시골이다 보니 먹을 것이 많지 않아 채소가 겨울 내내 싱싱한 상태로 보존되는 김치에 대한 애착이 더 컸던 것 같다. 당시 넉넉지 않았던 우리 가족은 김치를 한 해 생계를 책임져줄 먹거리이자 버팀목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김장을 해도 많아야 10포기 정도다. 그때만 해도 김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집집마다 배추 100포기 정도는 대수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은 매년 김장하는 날이면 온 가족이 대동단결했다. 장장 1박2일에 걸친 김장의 대장정은 배추를 절이는 것부터 시작이다. 배추김치를 만드는 데도 무, 갓, 쪽파, 찹쌀, 고춧가루, 멸치액젓, 갈치속젓, 다진 마늘, 다진 생강, 배즙까지 들어가는 재료가 엄청나다. 하룻밤 푹 절인 배추 물을 빼고 재료들을 다 섞어 빨간 김칫속까지 만들고 나면 이제 절반은 지났다 싶다. 김칫속을 넣고 꽁꽁 싸매 독에 묻고 나면 끝이 난다.

그러고 나면 본격적인 김장 파티가 시작된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푹 삶은 수육에 갓 담근 김장김치를 싸서 먹다 보면 힘들었던 시간과 피로까지 싹 가시는 느낌이다. 나는 그 시간이 김장의 부담감을 거뜬히 이긴다고 자신한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김치를 좋아했던 터라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가장 뇌리에 깊이 자리 잡은 추억 하나를 꺼내 보자면, 초등학교 2~3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김장을 열심히 도와드렸다. 김장김치를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저녁부터 시작된 두통이 고열로 이어지면서 3개월 이상을 앓아누운 적이 있다. 시골이다 보니 병원을 가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민간요법으로 치료한다고 버텨 보았지만 꽤 오래 앓았다. 자리에 누워 있으면서 나는 김치를 너무 많이 먹어서 병이 걸린 건가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호되게 앓고 나서도 나의 김치 사랑은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김치 하면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지내던 고시원에서의 추억도 빼놓을 수 없다. 9전10기의 최고령 사법시험 합격자다 보니 고시원 생활은 참 길고 힘들었다. 그 과정의 어딘가에 있었던, 상쾌한 공기를 마신 것같이 좋았던 순간들은 모두 김치와 연결되어 있다. 고시원은 식사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그만큼 김장을 많이 한다. 고시원이 김장을 하는 날이면 평소 열심히 공부만 하던 학생들도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다 같이 손을 보탰다. 평소에 잘 도와주지 못하다가 하루는 마음을 먹고 이른 아침부터 고무장갑을 끼고 주인아주머니 김장을 도왔다.

손이 빠른 나는 어릴 때 어머니를 도왔던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까지 더해져 유독 눈에 띄었단다. 도움을 요청한 이웃 사람들이 오기도 전에 끝나버린 김장에 주인아주머니로부터 끊임없이 칭찬을 듣기도 했다. 너무 열심히 일해 몸은 피곤에 지쳤지만 김장을 완벽히 끝내고 나니까 스트레스도 풀리고 나도 모를 성취감에 뿌듯했다. 당시만 해도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거듭되는 실패에 지쳐 있었을 때다. 짧은 시간 동안 그 많은 것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도, 그걸로 우리가 먹을 일 년의 양식을 준비한 것도 다 보람되게 느껴졌다. 그날의 추억은 단순히 김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나의 잠재력을 발휘한 것 같아 스스로에게도 위로가 된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김치에서 나의 모습, 우리네 사는 모습이 깃든 우리 음식이라는 동질감까지 느낀다. 나는 각종 양념의 절묘한 조화로 이뤄내는 김치가 맛이 있어 좋고, 내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동지 같아 좋다. 과거나 지금이나 따뜻한 추억이자 위로가 되는 음식이다. 또 가족, 이웃 간의 연결고리가 되어 더욱 정겹다. 내 삶에 김치와 같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뭐가 있을까. 우리 송파구민이 떠올랐다. 지난 8년간 서울 최대 인구가 살고 있는 자치구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구민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더불어 행복한 송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잘 담근 김치는 만드는 과정은 힘들어도 이를 잘 이겨내고 나면 보람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주민과의 대화를 진행하며 오늘은 또 어떤 질문이 나올까 하는 부담감을 느끼지만 함께 조화를 이뤄 나가자는 다짐으로 구민들을 살피다 보면 힘든 안건일수록 더 큰 보람으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한다. 그 과정을 완수했을 때의 기쁨과 성취감은 고시원에서의 어느 날처럼 상쾌한 보람으로 다가온다. 함께 어우러져 숙성되면서 더 깊은 맛을 보여주는 김치처럼 나도 송파구민들에게 함께한 시간 이상의 신뢰와 기쁨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박춘희 송파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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