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이 창간 반세기 만에 지령 2500호 고지에 도달했다. 1968년 10월 20일 ‘격조 높은 주간/지식인의 주간’을 표방하면서 첫 호를 내놓은 이래 급변하는 언론 환경을 헤치면서 시사주간지 최고의 지령을 쌓아올리는 먼 길을 달려왔다. 주간조선 창간 무렵은 선정적인 흥미 위주 주간지가 붐을 이루던 시기였다. 하지만 주간조선은 타 신문사 발행 주간지와는 처음부터 차별화된 편집방침을 내걸었다. 대중 영합적인 옐로 저널리즘을 배격하고 정론지의 성격을 지닐 것을 천명했다.

주간지가 언론시장에 돌풍을 일으킨 시기는 1960년대 중반 이후였다. 1964년 9월 27일에 창간된 ‘주간한국’이 선두주자였다. 주간지 시대를 선도한 인물은 한국일보 발행인 장기영(張基榮)이었다. ‘주간한국’은 창간 당시 5만1000부를 찍었는데 부수가 급격히 늘어나 1968년에는 40만부 선까지 돌파하여 일간지의 부수를 능가하는 공전의 인기를 누렸다. ‘주간한국’의 성공에 자극된 각 신문사는 경쟁적으로 주간지 발행에 뛰어들었다. ‘주간중앙’(1968. 8. 24), ‘선데이서울’(1968. 9. 22), ‘주간조선’(1968. 10. 20), ‘주간경향’(1968. 11. 17), ‘주간여성’(1969. 1. 1. 한국일보), ‘서울평론’(1973. 11. 서울신문)이 창간되었다.

초창기 주간지는 대개 타블로이드 신문이었지만 잡지 형태도 있었다. 그래서 주간지가 신문인가 잡지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주간지의 난립으로 독자 쟁탈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일간지들이 좁은 지면을 넓히지 못하고 있던 때에 신문사 발행 주간지들은 오락물과 스캔들 위주의 편집으로 독자의 저속한 취향에 영합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그러자 대학생들이 이를 비난하는 일도 벌어졌다.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은 주간지 불매운동을 제창했다.(1970. 9. 30) 연예인의 사생활 등 점차 더 자극적이고 저속한 방향으로 흐르는 기사가 넘쳐나자 독자들도 자극적인 기사를 외면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한때 우후죽순처럼 나타나서 오락물 위주의 선정적인 기사로 판매부수를 늘리던 주간지들이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주간조선은 주간지가 붐을 이루던 시기에 창간되었으나 다른 신문사 발행 주간지와는 처음부터 차별화된 편집방침을 내걸었다. 대중영합적이고, 선정적인 옐로저널리즘을 배격하고 정론지의 성격을 지닐 것을 천명했다. 주간조선 창간 무렵인 1968년 일간지의 주당 발행면수는 40면(8면 4일, 4면 2일, 일요 휴간), 구독료는 월 180원(1부 가판 10원)이었다. 주간조선은 타블로이드 32면에 값은 15원이었다. 타블로이드 판형은 신문의 절반 크기이므로 일간지 16면에 해당한다. 주 단위로는 일간지 40% 분량이다.

주간조선 창간호 권두에 실린 ‘일요논단’은 조선일보 주필 최석채의 ‘국민의 동질성이 무너질 때’였고, 2개의 특집은 ①한국의 이상적 지식인상, ②현대 에로티시즘의 분석과 비판이었다. 기사는 ‘베일 벗겨본 사법부 비화’ ‘청록파 시인들이 백록집(白鹿集)을 내다’ ‘무엇이든지 최고 멕시코올림픽’ ‘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문학과 인간’ 등으로 제목만으로도 타 주간지와의 차별화가 확인된다.

주간조선이 직면한 첫 번째 시련은 1975년 ‘조선일보 사태’의 여파에 따른 일시적인 ‘자진폐간’이었다. 1974년 12월 편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조선일보가 기자 두 명을 해임하자 이를 계기로 회사와 기자들의 갈등이 심화되어 ‘조선일보 사태’라는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기자들이 제작을 거부하자 회사는 비상체제에 돌입하여 1975년 3월 15일자로 주간조선 편집진을 본지 제작에 긴급 배치해 부족 인력 일부를 해소하였다. 이에 따라 회사는 주간조선의 ‘자진폐간’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령 332호였다.

하지만 두 달 뒤인 5월 18일자 333호부터 복간하면서 이전의 편집방침을 일신하여 ‘보도 해설 평론’에 중점을 두는 품위 있는 ‘교양 평론지’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일주일 동안의 주요 기사를 정리 요약하여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편집방침에 따라 ‘조선일보 일요판’의 성격을 띠도록 했다. 주간조선의 새로운 면모는 복간호의 주요 제목 일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계 전문가들의 글을 실어서 품위 있는 시사주간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컬러 특보, 한반도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안보 특집… 긴급진단, 분쟁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 미·일·중공·소 4각의 역학관계

한국과 핵의 전쟁(이기택)

방위조약 재평가(이상우)

미국과 신고립주의(김학준)

해외흐름: 키신저가 말하는 월남 이후

*보너스북 ‘1895년 한국’ - 80년 전 불(佛) 기자가 쓴 한말의 정정(政情) 풍물지

주간조선은 1979년 1월 지령 519호부터 판형을 4·6배판 책자 형태로 바꾸었다. 창간 이후 10년 동안 신문 형태 타블로이드 판형 지면을 이어오다가 책자형 잡지가 된 것이다. 제작비가 더 소요되지만 경제 발전에 따라 독자들의 출판물에 대한 소비 형태가 높아진 점을 고려한 것이다. 컬러사진과 화려한 내용의 광고 게재에는 잡지 형태가 효과적이었다.

1980년대에는 신문사가 경쟁적으로 발행하여 많은 판매 부수를 올렸던 타블로이드 주간지들이 쇠퇴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흥미 위주의 선정적인 읽을거리 기사에 독자들이 식상해하고 점차 관심이 줄어들면서 자진폐간으로 사라지는 주간지도 있었다. 1987년 7월 29일자로 서울신문이 ‘주간스포츠’를 폐간했고, 뒤이어 ‘주간중앙’(1987. 12. 20), ‘소년경향’(1987. 10), 한국일보의 ‘스포츠레저’(1988. 4), ‘스포츠동아’(1988. 4. 30) 등이 휴간, 무기정간 또는 폐간 등의 사유로 발행을 중단하였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주간조선은 ‘격조 높은 주간/지식인의 주간’이라는 창간 당시의 방침을 고수한 것이 적중하여 열독률과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책자형으로 바꾼 3년10개월 뒤인 1982년 10월, 창간 14주년을 맞아 지령 712호부터 증면과 가로쓰기 혁신을 단행했다. 종래 72쪽이었던 지면을 100쪽으로 확대하면서 컬러 지면을 16쪽으로 늘렸다. 출판 환경의 전반적인 성장과 광고시장의 성장도 이 같은 지면 확대를 가능케 했다. 주간조선은 ‘국내 유일의 시사교양 주간지’를 자처할 수 있는 위상을 과시할 만했다. 지면 확대로 ‘정치·경제·사회·외신·문화체육 등 각 분야에 걸쳐 지난주의 뉴스 정리, 뉴스의 뒷면을 파헤치는 뉴스 하이라이트’ 등을 신설했다.

주간조선의 가로쓰기도 당시의 출판문화 추세를 반영한 선도적인 혁신이었다. 일간지에 앞서 잡지·출판물과 광고 분야에서는 대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가로쓰기로 바뀌는 추세였다. 신문·잡지에 실리는 광고가 대부분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로 제작되자 일간지도 차츰 한자를 줄이고 부분적으로는 가로쓰기를 실시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지령이 오래된 문예지들은 1983년 무렵부터 체제를 가로쓰기로 바꾸고 있었다. 대표적인 문학 전문 잡지의 경우 ‘현대문학’(1982. 12. 지령 336호), ‘문학사상’(1983. 1. 지령 123호), ‘한국문학’(1983. 6. 지령 116호)이 모두 가로쓰기 편집이었다. 종합 월간지는 좀 늦어서 ‘신동아’(1988. 1)가 뒤를 이었고, ‘월간조선’(1999. 4)은 창간 19주년이 되어서야 가로쓰기 편집으로 돌아섰다. 보수 성향의 일간지 동아일보는 10년 뒤인 1998년 1월 1일부터 가로쓰기를 실시했고, 조선일보는 1999년 3월 2일자(지령 24306호)부터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황색 주간지가 쇠퇴하던 시기에 주간조선은 오히려 발행부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1985년 6월 1일자로 7만부를 돌파했고, 한 해 뒤 1987년 6월 19일에는 8만부 돌파 자축연을 가졌다. 같은 해 10월 18일 창간 19주년 기념호(지령 969호)는 10만부를 돌파하고 있었다.

모지(母紙) 조선일보의 고속성장도 주간조선의 발전을 견인했다. 조선일보는 1979년 2월 27일에 100만부 고지를 넘어섰고, 1984년 11월 4일에는 150만부를 돌파했다. 눈부신 신장세였다. 매년 국세청이 발표하는 100대 고액 납세법인에 조선일보가 포함될 정도였다. 조선일보는 1982년도에 전국의 법인 가운데 87위, 1983년도에는 65위의 납세 법인이었다. 전반적인 경제 성장의 호황을 탔다는 측면도 있지만, 조선일보의 급격한 사세 확장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였다.

조·평 사태로 언론자유 투쟁

주간조선은 ‘조·평(朝平) 사태’를 촉발한 기사로 정치세력의 탄압에 맞서 7개월 동안 버티면서 위기를 넘긴 사건도 겪었다. 1989년 3월 3일자(1039호)에 “좌파에도 우파에도 손짓, 수행의원들 ‘추태’ 만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것이 발단이었다. 발행부수 10만을 넘긴 때였다.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40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유럽을 순방한 성과의 평가와 뒷이야기였다.

김대중 총재의 유럽 순방을 동행 취재한 정치부 부지영(夫址榮) 기자는 “김 총재가 한국 야당 당수로서는 최초로 이탈리아 공산당 소속 정치인과 면담을 가진 것은 평소 ‘오해’를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는 요지의 기사를 썼다. 그런데 기사의 후반부에서 40여명의 방문단이 가장 역사가 깊고 비싼 최고급 호텔에서 방문일정 대부분을 보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순방의 성과를 훼손시킨 국회의원들의 비례(非禮)와 추태도 적시했다.

교황을 향해 ‘헤이’라고 부르거나 외국 귀부인에게 낯 뜨거운 농담을 건네는 의원들도 있어 동행 기자들이 ‘다시는 한국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하자’고 정식으로 결의할 정도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에 불만을 품은 평민당은 조선일보와의 전면전을 선포하여 불매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선전전을 병행했다. 여소야대의 정국에 다음 대선을 준비하는 유력 후보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던 정치 상황이었다. 평민당은 국회 299석 가운데 71석을 차지한 제1 야당이었고 유럽순방 수행의원은 8명이었다.

김대중 총재 주재로 간부들의 조찬회의와 의원총회를 열고 기사가 왜곡되었다면서 박영숙(朴英淑) 부총재를 위원장으로 ‘평민당 조선일보 허위 왜곡보도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당력을 기울여’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당보 100만부를 찍어 전국에 배포하면서 구독중단을 독려하는 한편으로 경쟁사 일간지 1면 하단에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전 5단 광고를 게재했다.

조선일보 기자의 당사 출입을 금지하고 부지영 기자의 집에는 협박전화를 지속적으로 걸었다. “애기를 숯덩어리로 만들겠다”는 끔찍한 말과 가족을 몰살시키겠다는 폭언을 퍼부어 부지영 기자의 부친, 부인, 딸 등 일가족은 집을 떠나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3월 7일 평민당은 주간조선 발행인 겸 인쇄인 방상훈, 편집인 최청림,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 신동호, 편집국장 인보길, 기자 부지영 5명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이와 함께 언론 사상 초유의 89억2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도 청구했다.

주간조선 기사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태였지만 조선일보와 제1야당인 평민당의 전면전으로 비화한 것이다. AP를 비롯하여 외국 언론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평민당의 처사는 명백한 언론침해라고 비판했고, 타임(TIME)은 ‘온건한 비판기사에 강력한 대응(It was a strong reaction to mildly critical article)’(1989. 3. 27)이라고 보도했다. 기자협회와 편집인협회도 성명을 통해 평민당의 조치가 부당함을 규탄했다. ‘조·평 사태’는 7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평민당의 구독중단 독려로 조선일보 판매부수는 5만부나 감소하는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가판에 주로 의존했던 주간조선은 오히려 부수가 늘어 ‘조·평 사태’ 과정에서 15만부를 돌파했다.

10월 17일 평민당은 돌연 조건 없이 형사고발과 민사소송을 취하했다. 당력을 기울여 다각적으로 벌였던 사건은 이렇게 없던 일처럼 마무리되었다. 언론자유를 지키겠다는 조선일보의 결연한 자세가 승리한 사건이다.

새로운 주간지들의 등장

주간조선이 선도하는 시사주간지의 영향력이 커지자 새로운 잡지가 나타났다. 1989년 10월 19일에는 언론인 박권상(朴權相)이 주관한 주간지 ‘시사저널’이 창간되었다. 조·평 사태가 마무리된 직후였다. 동아건설 대주주였던 최원영(崔元榮)의 자금 지원으로 창간되어 발행인은 최원영, 박권상은 사장 대우를 받는 편집인 겸 주필이었다. 진철수가 편집주간을 맡았다. 신문사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국내 시사주간지로는 유일하게 워싱턴과 파리에 특파원을 상주시키고, 런던과 도쿄 등지에 통신원을 두는 등 ‘국제화 시대에 앞서가는 시사주간지’를 표방했다. 창간호에 브란트 전 독일 총리 인터뷰를 싣는 등 미국의 ‘타임’ ‘뉴스위크’와 같은 독립적인 시사주간지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평가였다. 1999년 7월에는 일요신문 발행사인 서울문화사(발행인 심상기)가 시사저널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1994년 3월 16일에는 한겨레신문이 ‘한겨레21’을 창간하면서 10만부를 발행했다. 동아일보사는 ‘NEWS+’를 창간(1995. 9. 20)했다가 4주년인 1999년 9월 21일 ‘주간동아’로 제호를 바꾸었다.

시사주간지는 TV를 비롯한 전파매체를 비롯하여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급격한 보급과 같은 언론 환경 변화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따라 주간조선은 2003년 9월부터 시사잡지의 본령인 ‘탐사와 추적취재(investgative reporting)’를 강화하기 위해 기자가 현장에 잠입하여 직접 체험한 내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기자의 현장체험’ 코너를 활성화하고, 정치기사 위주의 딱딱한 시사잡지에서 탈피를 시도했다. 이를 위해 정치 뉴스를 연성화(軟性化)하여 ‘정치인의 아내’ ‘네티즌 여론조사’와 같은 난을 신설하고 ‘직격 인터뷰’ ‘여의도 막전막후’ 등 정치 이면을 다루는 새로운 기획을 시도했다.

시사잡지 사상 처음으로 전체 지면을 단일 주제로 꾸미는 시도를 단행한 것도 언론 환경 변화에 적응하려는 전략이었다. 주간조선 2004년 6월 10일자는 ‘환경 특대호’였다. 이 특대호는 재판을 발행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9월에 발행한 ‘암 특대호’도 호평이었고, ‘당뇨 특대호’(2005. 5. 2)는 가판 매진이 이어지며 4쇄까지 발행했다. 2006년 12월에 메가스터디와 공동으로 기획한 논술 시리즈는 발간 40여일 만에 ‘논술의 최고 명품(名品)’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국내 시사주간지의 선두를 달리면서 많은 특종과 화제를 불러온 주간조선은 지령 2500호라는 주간지 역사 초유의 기록을 달성했지만 앞으로 인쇄매체의 장점과 특성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고 미래를 개척할 것인지가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오는 10월의 창간 50주년에는 또 다른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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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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