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7일 김정은 위원장은 판문점에서 12시간 동안 머물다 갔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미디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무엇보다 예상을 뛰어넘은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오히려 그 다음에 벌어졌다.

회담 후에 방송사들이 앞다퉈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중에 압권은 그의 언행을 ‘신뢰한다’는 응답이 무려 77.5%에 달한다는 점이다. 회담 전에 조사한 결과가 없어서 수치를 들어 단언하긴 어렵다. 하지만 ‘위험한 독재자’가 불과 12시간 만에 ‘믿을 만한 지도자’로 깜짝 변신한 것이다.

비로소 그의 이미지가 바로잡힌 것일까. 반대로, 그의 이미지가 왜곡된 것일까. 이런 상념에 잠기다가 문득 떠오른 고전적 저작이 있다. 바로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1914~2004)의 ‘이미지’(The Image·1962)다. 우리말로는 ‘이미지와 환상’(2004)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부제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가짜사건에 대한 안내서(A Guide to Pseudo-events in America)’다.

‘가짜사건(pseudo-event)’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pseudo’는 본래 ‘같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다른’이란 뜻이다. 부어스틴은 시종일관 pseudo-event와 genuine event(진짜사건)를 대립적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다소 단정적이긴 해도 pseudo를 부득이 ‘가짜’로 옮긴다는 점을 밝혀둔다. 이것은 다분히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다.

가짜사건이란 말 그대로 진짜사건이 아니다. 진짜사건은 저절로 일어나는 자연발생적인 사건이다. 반면 가짜사건이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사건이다. 오늘날 우리는 가짜사건을 통해 각종 이미지를 양산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현실(reality)을 접할 때마다 현실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환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 부어스틴의 주장이다.

처음에는 신문들도 오로지 진짜사건만 뉴스로 다뤘다. 그러나 차츰 뉴스가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신문에 싣기로 한 사건으로 바뀌면서, ‘이게 진짜냐’라는 질문보다 ‘이게 뉴스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이 중요해졌다. 결국 기자는 진짜사건이 부족하면 가짜사건으로라도 뉴스를 채워야 했다. 뉴스는 더 이상 모으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 되었다.

이런 추세는 그래픽 혁명을 통해 가속화되었다. 그래픽혁명이란 사건이나 풍경을 인쇄된 이미지로 만들고 보관하고 전달하고 배포하는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것을 의미한다. 사진, 축음기, 라디오, TV 등이 연달아 등장했다. 이런 변화를 통해 진짜 서부 카우보이보다 가짜 존 웨인이 더 멋있는 카우보이로 여겨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런 가짜현실이 우리를 열광시킨다. 우리는 환상이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세상, 그리고 이미지가 실체보다 더 위엄을 갖는 세상을 살고 있다. 가짜사건의 애매모호함을 즐겁고 환상적인 경험으로 여긴다. 오히려 인공적인 가짜현실을 사실로 믿음으로써 위안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가짜사건이 진짜사건을 압도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이런 환경에서 진정한 영웅은 사라지고 오로지 유명인(celebrity)만 득세한다. 그들은 그저 이름을 알리는 일에 골몰한다. 오늘날 유명인은 대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로 메워진다. 예술과 문학도 기술 발전과 더불어 대중화되면서 진품보다는 모조품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소설보다 그것을 각색한 영화가 더 각광받는다. 아예 영화를 소설로 만들기까지 한다.

리얼리티를 경험하고 모험을 즐기는 여행도 사라졌다.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관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심지어 유명 관광지도 상업적으로 ‘만들어진다’. 사실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가짜현실이다. 그것은 다양한 유물이나 작품을 한곳에서 편리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전시물들은 본래 자리에서 분리되어 진짜현실을 상실하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미국에서는 얻는 데 약간 힘들기는 해도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꿈은 허황된 환상으로 바뀌었다. 꿈은 이루어져도 환상은 그냥 소비되고 만다. 그럼에도 “우리는 환상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고… 더 ‘진짜’같이 만들어서 어리석게도 그 속에서 살려고 하는 역사상 최초의 인간들이 되려고 한다.”

이처럼 부어스틴은 가짜사건이 만연한 20세기 미국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더 이상 그의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말았다. 오히려 가짜사건이 시대의 대세가 되었다. 이제 가짜사건은 또 다른 가짜사건을 낳으며 진짜와 가짜의 구분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다.

다니엘 부어스틴
다니엘 부어스틴

‘만들어진’ 뉴스의 세상

요즘 우리나라 TV도 온통 리얼리티 프로 천지다. 이런저런 유명인들이 수많은 스태프와 카메라에 둘러싸여 떠들고 먹고 마신다. 심지어 침실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자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실은 모두 가짜사건이다. 이런 가짜사건은 아예 알릴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더욱 극적이고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보기에 친근하고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도록 꾸며진다. 또한 그것은 손쉽게 유명인을 만들기도 한다. 더구나 돈이 된다.

그리하여 언론학자들은 가짜사건(pseudo-event)을 아예 미디어 이벤트(media event)라는 개념으로 중립화시켰다. 이제 사건을 미리 기획하고 만들어 미디어에 보도되도록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일로 권장된다. 심지어 뉴스도 인터뷰, 보도자료(press release), 뉴스 흘리기(leak) 등을 활용해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 ‘만들어진’ 뉴스가 진짜사건과 가짜사건을 넘나들며 우리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야말로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미디어 이벤트였다. 주요 의제는 이미 사전에 막후에서 완전하게 조율되었다. 회담 당일, 두 정상은 그저 미디어를 상대로 한껏 화기애애한 모습을 연출했다. 언론은 그 모습을 멋지게 ‘만들어’ 내보냈다. 그것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가짜사건인 것이다.

이번 회담은 풍성한 결과를 도출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김정은 위원장의 극적인 이미지 변신이다. 그는 우리 측이 마련해준 정교한 미디어 이벤트를 통해 단 하루 만에 우리 국민의 77.5%로부터 ‘신뢰’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깜짝 놀랄 일이다. 하지만 상대가 진정으로 신뢰할 만하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부디 이런 믿음이 허물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지’를 통해 부어스틴은 가짜사건이 미국병이라고 비판하며, 그 환상을 벗어나 아메리칸 드림을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대중사회는 가짜사건을 미디어 이벤트로 바꿔 놓고 오히려 그것을 권장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찬양도 외면도 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와중에 그의 경고가 다소 무뎌진 것 같으나 그 가치는 변함없다고 보아야 옳다.

키워드

#지금 이 책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전 한국공항공사 상임감사. 전 대통령비서실 비서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