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웅들을 위한 성전 ‘팡테옹’. ‘68’ 때 대학생들이 모여 열변을 토했던 곳이다.
프랑스 영웅들을 위한 성전 ‘팡테옹’. ‘68’ 때 대학생들이 모여 열변을 토했던 곳이다.

“우린 또 다른 혁명이 필요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가 함께 망할 것이다.”

최근 프랑스 파리 노천카페에 앉아 옆자리 남성과 대화를 나누던 중 접한 얘기다. 올해 41세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취임 이후 프랑스 상황에 대해 묻자, ‘혁명’이란 단어가 몇 번이나 등장한다. 마크롱이 참신한 이미지를 이용해 부자를 위한 정책에만 올인한다는 것이 혁명이 필요한 근거라고 한다. 그렇게 젊지도 않고, 다혈질과는 거리가 먼 40대 중반의 차분한 남성이었지만, 혁명이란 단어가 입에 밴 듯하다.

카페에서 만난 남성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필자가 접한 프랑스인을 통해 얻어낸 나름대로의 결론은 전 세계를 통틀어 프랑스인만큼 혁명이란 단어를 즐기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조금 얘기가 길어진다 싶으면 어느 틈엔가 혁명이란 단어를 남발한다. 불법이민, 테러, 빈부격차, 악명 높은 지하철과 비행기 파업, 심지어 파리 곳곳에 널린 개 분비물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도 결론은 ‘혁명’이다. 혁명에 굶주려 있고 중독된 나라라고나 할까? 오죽하면 지난해 말 마크롱 대통령이 집권에 들어가기 직전 펴낸 자서전 제목조차도 ‘혁명(Revolution)’이었을까. 대통령에서부터 학자, 언론인 나아가 거리에서 만나는 보통 사람들도 혁명이란 단어를 즐긴다.

사실 한국인도 혁명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한국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정치인과 그 주변 사람들의 전용 슬로건처럼 쓰인다. 보통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혁명을 입에 올리는 경우는 많지 않다. 중국, 북한과 같은 나라에서 말하는 혁명은 공산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지만 프랑스인이 말하는 혁명은 진짜 혁명이다. 기존의 것을 전부 뒤엎고 새로운 질서와 법칙에 의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 같은 것이 보통 프랑인들이 꿈에 그리는 혁명의 모델이다.

흥미로운 것은 21세기 프랑스인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혁명관이다. 자신의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워 처형하는 식의 핏빛 이벤트와는 거리가 좀 있다. 혁명 초기단계의 살벌하고 잔인한 폭력적 상황은 전부 생략한다. 요즘 프랑스인이 말하는 혁명은 후반전 종료 1분 전에나 목격할 수 있는 결과로서의 혁명이다. 갈등 없이 곧바로 해피엔딩으로 끝내자는 식이다.

혁명이란 단어는 2018년 프랑스를 달구는 키워드 중 하나다. 이유는 올해 50주년을 맞는 ‘May 68’(1968년 5월) 사태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서방 지성사를 바꾼 사건이다. 당시 대학생, 노동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반전운동가가 주축이 돼 20세기 프랑스 역사의 간판이었던 샤를 드골 대통령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킨 반란의 역사다. 당시 드골은 프랑스의 독립과 영광을 쟁취해낸 국부(國父)와 같은 존재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을 통해 전승국 자리까지 확보한 외교의 달인이자, 프랑스의 자존심을 되찾아준 인물이었다. 유엔 상임이사국에 프랑스를 올려놓으면서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는 거리를 둔 용미(用美)와 반미(反美)를 오간 전략전술가였다. 드골이 없었다면 전후(戰後) 프랑스의 정치적 위상은 2류국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국제정치만이 아니라 경제부흥에 성공한 인물도 드골이었다. 그런 영웅을 구시대 불통 인물로 규정하면서 물갈이한 것이 바로 ‘68’이다. 역설적이지만 천하의 드골을 쫓아냈다는 점에서 혁명이란 단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는 역사가 ‘68’이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

심드렁한 ‘68’ 50주년

그러나 공식적 차원에서 ‘68’은 혁명이란 브랜드와는 무관하다. 개인이나 정당 차원에서야 68혁명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정부나 언론의 공식적인 표현은 그냥 ‘May 68’(1968년 5월)이다. 혁명과 쿠데타는 한국의 현대사를 규정하는 단어들이다. 중간을 넘나드는 제3의 표현은 없다. 하지만 프랑스는 다르다. 나폴레옹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사후 200년이 지난 지금도 애매모호하다. 권력에 심취한 독재자이자 황제인가, 유럽 전체에 자유의 정신을 퍼트린 해방자인가? 하나의 영역 안에 가두기 어려운 인물은 나폴레옹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혁명을 꿈꾸고 탐하는 사람들에게는 섭섭하겠지만, 50년 전 드골을 몰아낸 5월의 역사 역시 그냥 ‘May 68’로 남아 있다.

‘68’ 50주년에 즈음해 현재 프랑스에서는 갖가지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신문, 방송, 잡지가 앞장서 당시의 상황과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미 지나간 흑백필름으로 느껴진다. 당시 대학생들은 이미 70대에 접어든 고령자들이다.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5·16군사정변에 대해 얘기해봤자 케케묵은 얘기로 듣는 식이다. 더불어 프랑스는 ‘혁명 인플레’의 나라다. 혁명이란 단어도 좋아하지만 예찬의 대상이 되는 큰 사건들도 즐비하다. 1789년 혁명은 물론,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구시대와의 전쟁,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닥친 제3공화국 창설과 파리코뮌 등 유럽을 통틀어 프랑스만큼 혁명과 변란이 잦았던 나라도 드물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의 역사인 ‘68’은 화려한 기존의 혁명사에 비하면 뭔가 약하다. 파리 곳곳의 ‘68’ 현장을 돌아다녀봐도 신문, 잡지에서 전하는 당시의 함성이 잘 와닿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도 ‘68’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68’의 총본산 라틴쿼터

최근 파리에서 ‘68’을 되새겨보기 위해 들른 곳은 ‘라틴쿼터(Latin Quarter)’다. 센 강변 남단 파리 제5구와 6구에 들어서 있는 젊음의 거리다. 소르본대학을 비롯해 10개 정도의 크고 작은 대학이 몰려 있는 곳이다. 중세 때 거주자 대부분이 라틴어로 소통했기 때문에 라틴쿼터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늦봄의 파리는 산책의 황금기다. 섭씨 20도 전후의 맑은 날씨를 즐길 수 있는 좁은 골목이 곳곳에 숨어 있다. 대학생의 주머니는 얇다. 점심코스 한 끼에 15유로, 맥주 한 잔에 4유로 정도의 저렴한 레스토랑과 카페가 라틴쿼터의 일상풍경이다. 관광객들로 들끓는 다른 지역과 달리, 오래된 책방과 앙증스러운 전시관도 많다. 조용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라틴쿼터는 ‘68’ 총본부에 해당한다. 소르본 캠퍼스를 비롯해 전국의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모여 경찰과 대치한 곳들이 곳곳에 있다. 라틴쿼터는 경사 10~20도 정도의 낮은 언덕을 끼고 있다. ‘68’ 때 대학생들은 고지대에 방어망을 치고 시위를 벌였다. 불지른 자동차는 물론 통째로 뽑아낸 가로수로 경찰의 진입을 막았다. 투석전도 당연히 벌어졌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 서울의 시위 현장에서도 투석전이 있었지만, 프랑스 ‘68’ 당시와 비교하면 애들 장난이었을 것이다. 일단 프랑스 시위 현장에 등장하는 돌은 우리보다 크다. 지금은 아스팔트 길로 변해 있지만, 당시 라틴쿼터는 가로 세로 15㎝의 사각형 대리석으로 도로가 메워져 있었다. 바닥을 내리치면 바로 투석용 무기들이 튀어나온다. 도로 구석에 아직도 남아 있는 당시의 도로포장용 대리석을 살펴봤더니, 한 대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듯한 강도다. 최근 프랑스의 한 신문은 당시 투석전에 사용됐던 도로포장용 대리석들이 ‘68 기념품’으로 팔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68’ 사태는 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자가 주도한 대학가 시위에서 출발했다. 전후 산업화 과정에서 벌어진 계급적 모순과 빈부격차, 베트남전을 둘러싼 반전운동, 중국에서 시작된 문화혁명에 대한 막연한 동경, 전쟁세대가 독점한 권위에 대한 반발, 냉전 당시의 이념적 방황 등이 어우러져 벌어진 기존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불만이 본질이다.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70대 말의 드골은 ‘감히’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대학생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리려고 했다. 이념에 놀아난 철부지들의 장난으로 보고 경찰을 투입해 전원 구속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자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정당들이 대학교 시위에 가담하면서 반(反)드골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다.

당시 드골을 지지하던 노조 지도층도 시위대의 적이 됐다. 노동조합 지도부의 명령을 무시한 노동자들의 산발적 시위가 이어졌다. 아래서 들고일어난 프랑스판 문화혁명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 순간은 5월 6일 소르본 캠퍼스에서 발생했다. 대학생과 교사, 노동자 2만여명이 최루탄을 터트리는 경찰과 충돌하면서 소르본으로 통하는 길목 곳곳이 전쟁터로 변했다. 방화와 투석이 오가면서 하루 만에 학생 250명과 경찰 150명 등 모두 4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만이 아니었다. ‘프랑스답다’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몇 달간 이어진 장기시위에도 불구하고 ‘68’ 사태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쨌든 대학에 이어 노동자와 교사들의 전국 동맹파업이 이어지면서 ‘드골 퇴진’이 ‘68’의 제1 목표로 부상했다.

파리 서점에 진열돼 있는 ‘68’ 관련 서적들.
파리 서점에 진열돼 있는 ‘68’ 관련 서적들.

‘팡테옹’ 지하 무덤 입구.
‘팡테옹’ 지하 무덤 입구.

투석전 벌이던 대리석이 기념품으로

프랑스에서 ‘68’이 기존의 혁명 반열에 올라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드골 퇴진 후 닥친 황당한 결과에서 비롯된다. 당시 드골은 전국 규모의 시위와 파업에 굴복해 재신임 총선거를 약속했다. 사실상 국민적 신임을 잃었지만, 스스로 하야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6월 말 총선거에서 조르주 퐁피두가 이끄는 드골파 정당 UDR이 압승을 하게 된다. 전체의석 486석 가운데 353석을 차지한다. ‘68’을 주도한 좌편향 정당들과 노동단체들은 소수로 전락해버렸다. 침묵 속의 대중(Silent Majority)이 판세를 뒤집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한 시대착오적 이념놀이가 ‘68’의 실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바로 ‘68’에 혁명이란 이름이 지금도 떳떳하게 붙지 못하는 이유다.

당시 30대 이상 프랑스인들 중 일부는 ‘68’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 당시 젊은이들이 난리를 친 것은 단지 ‘섹스혁명’일 뿐이라고 비꼬는 차원에서다. 성적 자유를 부르짖던 당시 대학생들의 파격적인 윤리도덕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레드걸(Red Girl)’은 ‘68’ 당시 인기 캐릭터 중 하나다. 붉은 피로 상징되는 자유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자유롭게 혼전 섹스를 즐기는 정열적인 여성도 의미한다. 덕분에 50년이 지난 2018년, ‘68’의 의미를 정치가 아닌 문화 차원의 혁명(Culture Revolution)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68’을 이끈 지도자의 상당수는 대학 졸업 후 정치가 아닌 전위 문화 영역에서 활동했다. 주목할 점은 ‘영웅’ 드골에 대한 ‘68’ 당시의 여론이다. 국민들이 드골을 지지해 드골 정당에 표를 준 것이 아니었다. 백전노장, 고집쟁이에 대한 찬성이 아니라 프랑스 역사 그 자체로 굳어진 시대정신과 이상(理想)에 동의하는 차원에서 드골 정당에 표를 준 것뿐이었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이념형 정당보다 ‘드골 없는 드골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라틴쿼터에서 필자가 특히 주목한 곳은 팡테옹(Phantheon)이다. ‘68’ 때 대학생들이 모여 열변을 토하던 곳인 동시에 과거 프랑스혁명의 흔적이 배어 있는 역사 체험 현장이다. 팡테옹은 고대 로마의 판테온을 흉내 내 만든 프랑스판 성전이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 신을 모신 사원이란 의미다. 로마 판테온이 고대 그리스 신들을 모신 성(聖)의 사원인 데 반해, 파리 팡테옹은 프랑스혁명 영웅들을 모신 속(俗)의 전당이다. ‘68’ 때 대학생들이 팡테옹 앞에 모인 이유는 역사 속 혁명가들과의 대화를 통한 정통성·정당성 확보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팡테옹은 소르본 캠퍼스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점심시간대에 갔기 때문에 주변은 샌드위치 도시락을 들고 온 대학생들로 만원이다. 50년 전 방어벽을 사이에 두고 최루탄과 돌이 오가던 광장이지만 지금은 평화롭다. 팡테옹은 밖에서 봐도 엄청 크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증축한 로마 판테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이탈리아 문화의 최대 모방자는 프랑스다. 가장 큰 차이점은 모방 작품의 크기다. 이탈리아에 비해 무조건 크다. 팡테옹 전방은 로마의 판테온처럼 6개 기둥으로 이뤄져 있는데 기둥 하나하나가 초대형이다.

팡테옹의 전신은 주네비에브(St. Genevieve) 교회다. 작고 낡은 교회로, 루이 15세가 병에서 회복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증개축에 나선 건물이다. 새로운 건물로 재탄생한 것은 1792년, 프랑스혁명 발발 3년 뒤다. 단두대 공포정치가 맹위를 떨칠 당시 프랑스 국민회의는 왕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혁명열사를 위한 성전을 만들었다. 혁명과 관련해 숨진 열사의 시신을 보관하고 기리는 성전이 팡테옹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프랑스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묘로 변해가지만 그 중심에는 혁명열사들이 있다. ‘68’ 때 수많은 대학생들이 성지순례와 같은 마음으로 팡테옹 무덤을 찾았다고 한다. 2018년 현재 85명의 열사가 묻혀 있다.

팡테옹 지하 무덤 앞에 있는 볼테르 입상.
팡테옹 지하 무덤 앞에 있는 볼테르 입상.

대학생들의 성지순례 대상 팡테옹

건물은 크게 두 개의 층으로 나눠져 있다. 초대형 돔(Dome)을 중심으로 조각물과 그림으로 채워진 1층과, 혁명 애국열사의 무덤이 들어선 지하 1층이다. 1층 한가운데는 자유의 여신을 찬미하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혁명가와 군인들의 입상이 들어서 있다. 자유의 신은 남신이 아닌 여신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여신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혜는 자유인만이 누릴 수 있는 고결한 이상이다. 지하로 내려가자 차가운 공기가 느껴진다. 무덤이 들어선 곳은 어디를 가도 차갑게 느껴진다. 지하 입구 양쪽에 두 명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 무덤은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된 장자크 루소다. 왼쪽은 자연법에 기초한 종교적·사상적 관용과 자유를 주장한 볼테르의 무덤이다. 미묘한 웃음을 띤 볼테르의 입상도 무덤 앞에 들어서 있다. 프랑스혁명의 성전 입구를 사상가이자 문학가들이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1789년 프랑스혁명은 물론, 이후 공화정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상가들이다. 두 사람의 무덤 크기나 장식이 지극히 소박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아담한 크기에다 생전의 행적에 관한 간단한 소개가 관 옆에 새겨져 있다.

필자가 팡테옹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인물은 알렉상드르 뒤마와 빅토르 위고다. 중학교 때 밤을 새며 읽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과 ‘레미제라블’의 저자다. 두 소설 모두 프랑스혁명 이후 발표된 작품들로 당시 ‘혁명시민(Citoyen)’들을 감동시킨 작품들이다.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에 대한 고발과 복수와 사랑, 그리고 관용이 두 위대한 작가들의 공통 주제다. 작품이 영화로도 수차례 제작된 덕에 일반인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올 위고보다 필자는 뒤마가 더 친숙하게 와닿았다. 어릴 때 읽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대한 환상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일까.

뒤마와 위고 무덤은 지하 1층 맨끝에 있다.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한 것으로 유명한 평론가 에밀 졸라의 무덤도 함께 들어서 있다. 입구 왼쪽이 위고, 오른쪽이 졸라, 가운데가 뒤마다. 다른 무덤과 달리 꽃들이 놓여 있다. 혁명을 외치며 최전선에서 싸우는 날 선 목소리가 아니라 혁명을 꿈꾸던 문학가와 사상가들이 혁명성전의 진짜 주인공인 듯하다.

영국 작가 토머스 엘리엇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말했다. 앞서 카페에서 만났던 40대 프랑스 남성은 말한다. “5월은 혁명의 계절이다. 피가 튀는 현실이 아니라 꿈과 이상으로서의 혁명의 계절이 5월이다. 혁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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