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6일 입적한 신흥사 조실 무산 스님. 법호가 설악, 속명은 조오현이다. 세수 87세, 승납 60세이다. ⓒphoto 전기병 조선일보 기자
지난 5월 26일 입적한 신흥사 조실 무산 스님. 법호가 설악, 속명은 조오현이다. 세수 87세, 승납 60세이다. ⓒphoto 전기병 조선일보 기자

감쪽같이 몰랐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을. 그 만남 사흘 뒤에 홀연 히 세상을 버릴 줄을.

5월 26일 입적(入寂)한 신흥사 조실(祖室) 설악(雪嶽) 무산(霧山) 스님 이야기다. 무산 스님은 ‘설악산 호랑이’다. 1970년대 중반 설악산에 들어온 스님은 이후 40년 이상 설악산을 호령했다. 스님이 신흥사 주지, 회주(會主), 그리고 조실(祖室) 등 어른으로 있는 동안 설악산은 ‘잡음’이 없었다. 돈 문제로 시비가 된 적도, 권력 다툼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없었다. 무산 스님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시조시인인 그는 파격과 전복(顚覆)의 언어로 아귀다툼하는 세속을 들었다놓았다. 그런 그의 그늘엔 스펙트럼의 끝을 알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사람이 모여들었다. 입적 후 문재인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스님과의 인연을 이야기할 정도로 그는 대통령부터 거지까지 모두와 친구였다. 그에겐 보수·진보, 종교의 벽, 국적(國籍), 인종도 벽이 되지 못했다. 그의 입적 후 아무 곳에도 걸림이 없었던 ‘비결’의 봉인이 하나둘 풀렸다. 그 비결은 어쩌면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마음과 물질의 ‘보시행’. 생전에는 입밖에 벙긋도 못 하게 엄명을 내렸던 선행(善行)들이었다. 시간대별로 스님의 마지막 길을 정리해봤다.

#1. 5월 23일 오후 3시 강원 인제 만해마을

“모두 다 바람에 이는 파도야.”

5월 23일 오후 ‘만해마을’에서 만난 스님은 유독 이 말을 되뇌었다. 자신의 시 ‘파도’의 마지막 구절. 스님은 시 전문(全文)도 여러 번 읊었다. 스님은 200여수(首)에 이르는 자신의 시를 모두 다 암송하는 분이었다. 부처님오신날 다음날이자 입적 사흘 전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

스님과 조선일보는 1990년대 말부터 만해축전과 만해대상을 함께 진행해왔다. 후배 시인이자 후배 스님으로 만해와 시차(時差)를 두고 백담사라는 무대를 공유한 무산 스님은 만해 한용운 선생 선양에 평생을 바쳤다. 스님은 수시로 만해축전과 만해대상에 관해 의견을 전하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연락이 없었다. 차일피일 하다 보니 부처님오신날이 지나고 하안거(음력 사월보름~칠월보름 사이 집중 수행 기간) 시작하는 입재일(올해는 5월 28일)이 코앞이었다. 스님은 2014년부터 매년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가하고 있었다. 며칠 후면 석 달 동안은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오신날까지는 분주할 듯하여 다음날인 23일 오전 전화를 했다. “하안거도 곧 시작인데, 오늘이나 내일 찾아봬도 될까요?” 뜻밖에 스님은 선선히 “고맙다, 어서 오라”고 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하니 오후 3시쯤 만해마을에 도착했다.

풍경은 똑같았다. 스님이 앉는 의자 왼편에 놓인 ‘해골’도 그대로였다. ‘해골’은 스님이 10여년 전 자신의 두개골을 스캔해 실물 크기로 만든 조각작품이다. 스님은 ‘해골’을 가리키며 “이기(이게) 우리 본래 면목이라”고 했다. 활기도 넘쳤다. 정치 이야기도 나왔고, 남북 문제도 나왔다. 스님은 선문답(禪問答)처럼 말했다. “이렇다 저렇다 싸우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다 지(제가) 살라고(살려고) 그러는 거야. 모든 생물은 다 살려고 하기 마련이야. 그런데 그기(그게) 모두 다 바람에 이는 파도야.”

자리를 함께했던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는 곧 미국에서 스님의 시집 ‘절간 이야기’가 영역(英譯) 출간될 예정이라고 했다. 스님은 “내가 10년만 더 살면 한국의 노벨 문학상은 내가 받을 거야”라며 소년처럼 웃었다. 소설가 이경자씨에겐 신경림 시인 안부를 물었다. 이씨가 “신 선생님이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다음엔 모시고 함께 오겠다”고 하자 스님은 “꼭 모시고 오라”고 했다.

무산 스님이 자신의 두개골을 스캔해 만든 조각작품.
무산 스님이 자신의 두개골을 스캔해 만든 조각작품.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그림’이 없어진 게 느껴졌다. 시인으로 유명한 스님은 여기(餘技)로 그림도 그리곤 했다. 본인은 “매직으로 끼적거리면 1~2분에 하나씩 그린다” “몇 년 전에 미국 휴스턴 화랑에서 ‘한 점에 1억원씩 팔아드리겠다’고 했지만 말도 안 된다 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얼마 전 싹 다 태워버렸다고 했다. 그때까진 아무런 낌새를 못 챘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없진 않았다. “나는 곧 갈 끼다(갈 것이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10년도 넘게 해온 말씀. 그런데 이날은 과거와 다른 ‘액션’이 있었다. 문득 “내가 임종게를 써놨다”고 했다. 임종게는 선사들이 입적을 앞두고 평생 수행 경험을 압축해 후학들에게 전하는 시(詩) 형식의 문장. 스님이 내민 프린트된 A4용지 하단엔 ‘2018. 4. 5’라는 작성 일자까지 적혀 있었다.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 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한마디로 ‘얽매이지 않고 살다 간다’는 이야기였다. 스님은 임종게를 보여주며 “마지막 구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는 ‘짐승이 됐다’는 뜻”이라며 친절히 해설까지 붙이며 “어떻노? 좋제?”라고 했다. 그때까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사흘 후에 그가 입적할 줄은.

#2. 5월 23일 오후 10시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은 밤 10시. 기자 일행 뒤로 스님과 면담을 한 이들이 거처에서 나온 후였다. 마지막 손님은 인제군 용대리 이장들과 백담사 셔틀버스 운전기사들이었다. “저녁을 못 먹었다”는 이들과 함께 인근 식당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스님이 이장들에게 ‘내 장례비’라며 3억원을 주셨다. ‘남으면 장학금으로 쓰라’ 하셨다” “백담사 셔틀버스 기사들에게 두둑이 챙겨줬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문득 몇 시간 전 만났던 스님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스님이 벌써 20일째 곡기(穀氣)를 제대로 못 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스님이 인제군과 용대리의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아낌없이 기부한다는 이야기는 더러 들었지만 버스기사들에게까지 ‘보너스’를 줬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인생 잔고(殘高) 정리’의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라도 스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스님은 “그냥 서울로 올라가라 해라”라고 수발 드는 이를 통해 전했다. 만해마을을 떠났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3. 5월 26일 오후 5시30분

“조금 전 스님이 돌아가셨다.”

스님의 지인으로부터 급보(急報)가 왔다. 불안한 느낌이 현실이 됐다. 스님을 만나고 돌아온 후부터 계속 전화를 드렸으나 연락은 닿지 않았다. 이날 한밤중에 설악산에 도착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기자가 만해마을을 떠난 24일 오전 10시 무렵부터 스님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오랜 기간 곡기를 섭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쇼크가 온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스님은 깨어나지 못했다. 입적 시각은 5월 26일 오후 5시11분으로 기록됐다.

#4. 5월 27일 이후의 긴 그림자

“돌아보니 이미 (입적을) 준비하셨던 것 같다.”

스님이 떠난 후 가까이 모셨던 이들은 입을 모았다. 올 초부터 느낌이 달랐다는 것이다. 모두가 스님이 던진 ‘힌트’를 받았지만 그게 힌트인 줄 몰랐다.

신흥사 주지 우송 스님은 “안 들키려 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평소에 스님 방에 들어가면 빨리 빠져나올 궁리만 했어요. 늘 야단 맞으니까요. 그런데 올 초부터는 야단을 안 치셔요. 그래서 속으로 ‘내가 잘하고 있나? 아니면 스님이 놓아버리셨나?’ 생각했지요.”

우송 스님은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무산 스님을 찾아 카네이션을 드렸다. “저도 모르게 ‘훌륭한 어른을 아버님처럼 모셔서 행복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스님이 야단도 안 치시면서 ‘애썼다’ 하셔요. 그리곤 이내 ‘정신 차려야 해!’라고 싸늘하게 말씀하셨어요.” 평소 스님의 화법(話法)이다.

문인들도 마찬가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평생의 문우(文友)인 시조시인 이근배씨를 만났을 때 무산 스님은 갑자기 염불을 했다. 이근배 시인은 “정말 목청 좋게 염불을 외시더라. 평소에 없던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평생 도(道)를 닦아온 고승(高僧)의 염불이었다. 다들 좋다고 하니 스님은 몇 번 더 염불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 죽으면 호상(護喪)은 승단에선 정휴 스님, 문단에선 사천(沙川·이근배) 선생이 해주소”라고 했다. 이들도 그 당시엔 이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다.

백담사가 자리한 용대리 주민들 역시 스님의 입적을 짐작하지 못했다. 마지막 만남에서 “이건 내 장례비”라며 3억원을 맡기고 “남으면 장학금으로 쓰시라” 했을 때에도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워낙 평소 용대리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과 자녀들의 학업을 주민들이 부탁하기 전에도 먼저 배려해왔고 “곧 간다(입적한다)”고 이야기해왔기 때문. 스님 입적 후 주민들이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인제군장학회에 25억원, 용대리장학회에 3억원 이상 기부했다고 한다. 스님은 생전에 ‘장학금 전달식’ 한 번 열지 않았고, 따라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 스님은 항상 뒤로 숨었다. 만해축전, 만해대상 역사가 20년이 넘었지만 그 기념식장에 서 있는 스님의 사진은 거의 남지 않았다.

5월 27일 신흥사 빈소에서 만난 신달자 시인이 전한 일화는 그가 왜 ‘큰스님’인지 보여준다. “2001년이었어요. 당시 남편이 세상 떠나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았지요. 그 무렵 집 근처 포장마차의 인간군상을 보고 ‘저 거리의 암자’라는 시를 발표했지요. 그랬더니 스님에게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어요. 모르는 분인 데다 저는 가톨릭 신자라 안 갔어요. 그랬더니 겨울에 다시 연락이 왔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갔더니 동안거 시작하는 날이에요. 동안거 들어가는 스님들 앞에 저를 불러 세우시더니 ‘너희들이 신달자 시인의 시 같은 작품 하나만 남겨도 수행 잘한 것’이라 하셔요. 깜짝 놀랐죠. 그런데 그 말씀이 당시 저에겐 큰 위로가 됐어요.”

스님은 평소 “종교인은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위 잘 맞춰준 이는 석가모니와 테레사 수녀”라고 했다. 세상의 비위를 맞추며 스님은 항상 ‘안 들키려’ 했다. 속이려 했다. 그리고 모두 속아넘어갔다. 자신의 마지막 길까지, 주변의 모두를 속여넘기면서 “억!” 소리를 남기고 떠난 무산 스님. 극락에서 “또 속아넘어갔지?”라며 빙그레 웃고 계실 것 같다. 영정 사진 속 미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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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조선일보 종교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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