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 ‘삼인문년도’, 19세기, 비단에 색, 143×69㎝, 간송미술관
장승업 ‘삼인문년도’, 19세기, 비단에 색, 143×69㎝, 간송미술관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다. 거친 절벽 사이로 보이는 푸른 바다에 파도가 출렁인다. 그 바다를 가리키며 세 노인들이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다. 세 노인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듯 생김새도 특이하고 옷차림도 기괴하다. 도대체 나이 드신 분들이 무슨 연유로 이 험한 산중에 올라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될 즈음 세 노인들의 기찬 입담이 시작된다.

먼저 맨 아래 서 있는 노인이 말문을 연다.

“나이가 드니까 내가 몇 살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 다만 내가 어렸을 적에 천지를 만든 반고(盤古)와 친하게 지냈던 생각이 날 뿐이야.”

아니, 이게 뭐하는 수작이야. 듣고 보니 나이 자랑이네. 나도 질 수 없지. 중간에 선 노인이 맞받아친다.

“영감도 그러슈? 나도 마찬가지유. 아, 나도 말이지. 바다가 변해 뽕나무밭이 될 때마다 숫자를 세는 산가지를 하나씩 놓았는데 지금 내가 놓은 산가지가 벌써 열 칸 집을 가득 채웠지 뭐유.”

뻥을 쳐도 유분수지. 두 노인네가 진도를 너무 뺀다. 드디어 지팡이를 짚고 있던 세 번째 노인이 점잖게 목소리를 깐다.

“나는 말이지.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蟠桃)를 먹고 그 씨를 곤륜산 아래에 버렸는데 지금 그 씨가 쌓여서 곤륜산과 높이가 같아졌어. 어때? 내 나이에 비하면 당신들은 하루살이나 혹은 아침에 나왔다 저녁에 죽는 버섯과 다름없지 않아?”

세 번째 노인의 압승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입 털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나섰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참고로 반도(복숭아)는 선도(仙桃)라고도 하는데 삼천 년에 한 번 꽃이 피어 열매가 열린다. 불로장생(不老長生)에 대한 로망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준 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신선들일 것이다. 불로장생에 대한 로망을 단지 로망으로 끝내지 않고 직접 행동에 옮긴 사람도 있다.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이다. 그는 중국 전한(前漢) 때 실존했던 인물인데 곤륜산에 열린 복숭아를 훔쳐 먹어 18만세를 살았다고 전해진다. 세 신선을 등 뒤로 하고 선도복숭아 아래 앉아 있는 젊은이가 동방삭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송대의 문인 소식(蘇軾)의 ‘동파지림(東坡志林)’에 수록된 고사다. 그 고사를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이 그렸다. 부벽준(斧劈皴)으로 처리한 날카로운 바위, 과장적이고 왜곡된 파도의 표현, 해학적이면서도 기괴한 인물들의 모습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는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이 쓴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라는 제명이, 왼쪽 상단에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제발이 보인다. 같은 내용을 그린 작품이 국립박물관에 한 점 더 있다. 두 작품이 구도나 인물 배치가 유사하지만 국립박물관 소장본이 간송미술관 소장본에 비해 조금 더 섬세하고 화려하다. 장승업은 ‘삼인문년도’ 외에도 ‘춘남극노인(春南極老人)’ ‘추남극노인(秋南極老人)’ ‘녹수선경(鹿受仙經)’ 등 여러 점의 신선도(神仙圖)를 그렸다. 당시 이런 종류의 신선도가 인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제자인 안중식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1853~1920)도 신선도에 일가견이 있었다.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X취화선展

장승업은 수많은 일화와 에피소드를 남긴 작가다. 장지연(張志淵·1864 ~1921)이 쓴 ‘일사유사(逸士遺事)’에 적힌 내용이다. 고종 황제는 장승업의 화명(畵名)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여러 점의 병풍을 그리게 했다. 그런데 원래부터 얽매이기를 싫어한 장승업이 꽉 짜인 궁궐생활을 견딜 리 만무했다. 그는 몰래 궁궐을 빠져 나와 술을 마시곤 했는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노발대발한 고종이 그를 당장에 하옥시키려 했다. 그때 마침 당상관 민영환(閔泳煥·1861~1905)이 나서서 자신이 장승업과 친하니 자신의 집에 가두어 두고 그림을 끝내도록 하겠다고 청을 올려 가까스로 고종의 허락을 받아냈다.

김은호(金殷鎬·1892~1979)가 쓴 ‘서화백년(書畵百年)’에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전한다. 장승업이 관수동에서 소실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 흔한 장롱 하나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들은 장승업은 며칠 있다가 “그놈의 장롱 열 바리만 실어다주마”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던 중 경복궁 단청공사의 책임을 맡아 공사를 마친 후 단청 폐백으로 수천 냥을 손에 쥐었다. 그는 그 돈을 들고 술집에 가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난 후 관훈동의 장전(欌廛·장롱, 찬장 따위를 파는 가게)으로 가서 장롱 세 바리만 실어달라고 했다. 또 다음 집에 가서 두 바리를 더 사가지고 소실 집으로 갔다. 갑자기 장롱 다섯 바리를 받게 된 소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가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장승업의 생애에는 술과 기생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무수하게 많다. 이런 에피소드와 함께 장승업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취화선展’(동대문디자인플라자 11월 30일까지)이다. 영화 ‘취화선’의 명장면, 명대사와 함께 장승업의 작품을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이다.

문자향과 수예론 사이

장승업 ‘호취도’, 종이에 색, 135.4×55.4㎝, 삼성리움미술관
장승업 ‘호취도’, 종이에 색, 135.4×55.4㎝, 삼성리움미술관

그런데 그림 외적인 사연들로 인해 자칫 장승업의 작품성이 평가절하될 위험성이 크다. 장승업의 기량이 가장 잘 발휘된 ‘호취도(豪鷲圖)’는 그림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뛰어난 작품이다. 굳이 술과 관련된 ‘객기’를 결부시키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뜻이다. 나뭇가지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매가 먹잇감을 노려보며 고개를 돌린 모습을 보면 장승업의 핏속에 흐르고 있던 에너지를 순식간에 붓끝으로 쏟아낸 듯한 느낌이 든다. 매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다른 어떤 작가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호방함이 담겨 있다. 동양화에서 말하는 기운생동의 대표작으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필력이 무르익은 작품이다.

‘호취도’는 ‘꿩과 메추라기’와 쌍폭으로 삼성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일본 유현재에 소장된 ‘말’과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고양이’와 함께 같은 폭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장승업은 신선도뿐만 아니라 산수, 인물, 화조영모, 기명절지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능숙하게 풀어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조영모도에는 작가로서의 자신감과 활화산 같은 열정이 거침없이 녹아들어 있는 분야다. 간송미술관, 서울대박물관, 고려대박물관, 선문대박물관에 소장된 여러 폭의 화조영모도에서도 그 기량을 확인할 수 있다.

장승업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두 가지 장르의 화론(畵論)이 상존해 있었다. 첫 번째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추구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화파(畵派)의 예술관이다. 문자향 서권기는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라는 뜻으로 만권독서(萬卷讀書) 만리행(萬里行)의 수련과정을 마친 연후에야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한마디로 지식인인 선비화가들의 사의화(寫意畫)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예술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추사같이 총명하고 박학다식한 사람도 “나는 평생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내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 연후에야 가 닿을 수 있는 세계였다. 추사가 그러할진대 하물며 일반인들 중에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두 번째 화론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97~1859)의 수예론(手藝論)이다. 그는 가슴속에 있는 심의(心意)보다는 화가로서의 기량을 중시한 사람이었다. 즉 서화는 수예이므로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추사와 대척점에 섰다.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추사가 문자향을 강조했다면 여항문인이었던 조희룡은 손재주의 중요성을 들고나온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황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김정희 같은 혜택받은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조희룡 같은 중인들도 재주를 펼칠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장승업은 김정희 계열의 문기(文氣) 넘치는 사의화와 조희룡 계열의 기량이 강조된 수예작(手藝作)을 편견 없이 받아들여 자기 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림을 단지 남종화(南宗畵)인가 북종화(北宗畵)인가라는 단순한 잣대로 구분했던 이전 시대와 비교해보면 매우 달라진 양상이다.

장승업은 신선도와 화조영모도같이 수예가 강조된 작품을 그린 것은 물론이고 ‘귀거래도’나 ‘추성부도’ 같은 사의화도 그렸다. 물론 장승업이 그린 사의화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색깔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승업의 뒤를 이은 조석진과 안중식이 우리 근대미술의 중심축을 이루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자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칫 한쪽으로만 편향될 수 있는 위험성을 장승업이라는 천재화가가 융합을 시킨 셈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장승업을 단순히 술꾼이나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라는 차원을 넘어 진정으로 위대한 천재화가라고 불러야 할 이유다.

키워드

#미술
조정육 미술평론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