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은 정상외교를 통해 ‘위험한’ 독재자에서 순식간에 ‘믿을 만한’ 지도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회담 전이나 후나 여전히 동일인이다. 돌변한 것은 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이런 현상은 그동안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이제야말로 ‘냉전적’ 인식을 넘어 ‘사실적’ 이해로 나아가야 할 순간이다.

마침 북한의 ‘사실적’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귀중한 증언이 나왔다. 바로 태영호(56)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의 ‘3층 서기실의 암호’(2018)다. 태 전 공사는 출신성분이나 직급 측면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북한 정권의 심장부를 정확하게 관찰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 따라서 그의 증언을 읽어보면 생생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여기서 ‘3층 서기실’이란 김정은 위원장을 보좌하는 직속기관을 가리킨다.

태 전 공사가 중국 유학 후 외무성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88년이다. 곧이어 베를린장벽 붕괴(1989), 한·소 수교(1990), 소련 해체(1991), 한·중 수교(1992)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당시 북한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무엇보다 중·소 등 외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무언가 자력(自力)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 답은 핵개발밖에 없었다.

물론 핵에 대한 관심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겉으론 1970년대부터 한반도 비핵화를 외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서명했다(1985). 심지어 남북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명문화했다(1991).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핵개발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1990년대 초 위기상황이 닥치자, 그 계획은 긴박하게 현실로 옮겨졌다.

그 이후 북핵위기, 핵사찰 수용, NPT 탈퇴, 카터 방북, 제네바 합의,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 등을 통해 한반도 정세는 냉온탕을 오갔다. 그 사이에 수많은 아사자를 낸 이른바 ‘고난의 행군’도 벌어졌다. 하지만 북한은 남북, 미·북, 다자 회담 등으로 시간을 끌며 끝내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연변원자로가 재가동(2003)되고 핵실험이 감행(2006)되었다. 그 이후에도 다시 지루한 줄다리기 속에 또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016년 5월 노동당 7차 대회가 열렸다. 무려 36년 만이었다. 김정일도 생전에 열지 못한 당 대회였다. 그것은 핵무기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가능했다. 이를 계기로 위험한 핵 질주가 공식화되었다.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기를 이용해 2017년까지 핵무기를 완성한다는 목표였다. 북한은 그들의 계획대로 핵무기를 쥐고 올해(2018) 회담 테이블에 나왔다.

이처럼 북핵은 체제의 사활을 건 사업이다. 체제 유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전략은 일단 주효했다. 지금 그들은 핵을 지렛대로 삼아 주변국들의 관심을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그들이 이런 핵을 하루아침에 선뜻 포기할 리가 없다. 따라서 태 전 공사는 남북, 미·북 정상회담에서 표명된 ‘완전한 비핵화’를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그는 북한이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제법 살 만한 사회였다고 평가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사회주의적 열정이 순수했고 살림살이도 괜찮았다. 그러나 김정일이 중앙당에 입성하고부터 이상징후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1967년 ‘5·25교시’가 문제였다. 그것은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당내의 모든 파벌을 숙청하고 유일지도체제(절대수령론)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주민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 등으로 분리하여 엄격한 사회통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심지어 평양에는 핵심계층만 살도록 했다. 차츰 모든 보고는 김일성에게 가기 전에 반드시 김정일을 거쳐야 했다. 1980년대부터는 아예 김정일이 실권을 행사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차근차근 세습통치의 길이 열렸다. 권력은 김정일, 김정은에게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처음에 김정은은 “개성공단을 14곳 만들자”라고 말하는 등 제법 개방적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권력 공고화를 위해 곧바로 숙청, 처형 등 공포정치를 휘둘렀다. 심지어 이복형까지 살해했다. 물론 권력 공고화의 또 다른 한 축은 핵무기 완성이었다.

이제 김정은은 세습체제를 공고화하고 핵무기를 손에 쥐었다. 일단은 의도대로 되었다. 하지만 시련은 이제부터인지 모른다. 점점 높아지는 인민의 욕구를 채워줘야 한다. 무엇보다 개혁개방을 통한 번영이 절실하다. 문제는 개혁개방과 일인절대체제가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과감하게 개혁개방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2015년 3월 태 전 공사는 3층 서기실로부터 직접 은밀한 지시를 받았다. 모든 기관은 횡적 소통이 일절 금지된 가운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3층 서기실에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 그곳은 ‘삼수갑산에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정도다. 그리하여 3층 서기실이야말로 ‘모르는 게 없는 지도자’를 만드는 조직이요, 신격화와 세습통치의 근거지인 것이다.

하지만 그가 거기서 받은 은밀한 지시는 국가대사가 아니었다. 바로 김정철의 에릭 클랩튼 공연 관람에 관한 일, 즉 티켓 및 호텔 예약, 공연 및 관광 안내 등이었다. 그는 이 일을 잘해냈다고 서기실의 칭찬까지 들었지만 오히려 자괴감만 커졌다. 그동안 느껴왔던 크고 작은 실망이 증폭되었다. 두 아들은 물론이고 빨치산 가문 출신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외교관은 자식을 마음대로 데리고 다니지도 못한다. 대개 평양에 인질처럼 남겨두어야 한다. 한마디로 부모가 자식을 관할할 자유조차 없다. 그는 가족을 모아 놓고 “이렇게는 (더 이상) 못 살겠다.… 아버지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유산은 자유다”라고 토로했다. 가족들도 그의 뜻에 선선히 동의했다. 그는 2016년 여름 가족을 이끌고 망명했다.

북한은 체제 위협에 핵개발로 대응했다. 하지만 이때 체제는 일인절대체제다. 결국 체제와 절대권력자 개인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 북핵 문제의 근원이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현 체제를 대체할 아무런 수단도 기반도 없다. 그리하여 핵을 통해 수령체제를 보위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게 개혁개방을 통제하려는 북한, 이것이 오늘날 북한의 모순적 실상이다.

국제정치에서 상대가 나쁘면 타도해야 하고 착하면 우호를 맺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상대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 위에서 대책을 둘러싸고 다투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지만, 전제조건 자체를 놓고 다투는 것은 망국적인 노름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을 다녀온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상반된 보고를 한 사례가 역사적인 반면교사다.

‘3층 서기실의 암호’는 한 명석한 엘리트가 북한의 실상을 내부에서 정확하게 꿰뚫어본 현장 증언이다.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면 적어도 북한의 실상에 대해 다툴 일은 없다. 무엇보다 태 전 공사는 “북한은 핵 포기 안 한다”고 단언한다. 정확한 예언은 현실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 스스로는 빗나가기도 한다. 그의 전망이 아무쪼록 그렇게 빗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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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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