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한 박현모 교수의 반박이 실린 주간조선 2510호(왼쪽)와 이에 대해 반박한 이영훈 교수의 기고가 실린 주간조선 2512호.
이영훈 교수의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한 박현모 교수의 반박이 실린 주간조선 2510호(왼쪽)와 이에 대해 반박한 이영훈 교수의 기고가 실린 주간조선 2512호.

1 이영훈 교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에서 세종을 양반들의 성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백성들의 성군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근거로 그는 세종의 노비정책과 사대주의 외교를 들었다. 나는 주간조선 2510호에서 노비정책에 대한 이 교수의 사실왜곡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이 교수는 주간조선 2512호를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따라서 세종의 외교정책을 살피기 전에 세종시대 노비정책에 대한 이 교수와 나의 논쟁을 짧게 요약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가 세종을 16세기 노비 폭증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세종이 재위 초반에 만든 (노비의) 주인고소금지법(①)으로 인해 노비의 삶의 질이 현저히 악화되었고, 재위 중반에 역시 세종이 세운 노비종모법(②)과 양천교혼(良賤交婚) 방임정책(③)이 결합하여 노비인구가 대확장되었다(④)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①의 문제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했다. 주인고소금지법의 입법 책임자는 당시 상왕으로 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던 태종이라는 점과, 이 법 제정으로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았다’는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런데 실록을 다시 살펴보니 입법 책임자는 태종이 아니라 세종이었다. 물론 즉위 초반 세종은 ‘일체개품(一切皆稟)’, 즉 일체의 정무를 부왕에게 품의(稟議), 즉 아뢰고 의논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허조의 입법 제안을 ‘따른(從之)’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1420년(세종2년) 9월 13일에 이 법이 통과되었다는 이 교수의 주장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외 이 교수의 세종시대 노비제도 비판은 여전히 허점투성이임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 교수는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은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했다. 그 사실을 고발하지 않은 이웃이 있으면 수령을 벌주게 했으며(1434년 6월), 주인이 임의대로 죽이면 처벌하는 법을 만들게 했다(1426년 윤7월 형조에 내린 전지(傳旨)). 실제로 세종은 집현전 관리 권채나 이색의 손자 이맹균 같은 명문가 출신의 관리들이 계집종을 학대하거나 살인한 사건과 연루되었을 때 파직하거나 유배 보냈다(1427년 9월, 1440년 6월).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주간조선의 반론 글에서 노비를 함부로 죽인 주인을 처벌한 세종의 처벌 수위가 낮았다고 주장했다. 해당 관료의 직첩을 회수하거나 벌금을 내게 하거나 고향으로 쫓아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왕조는 노비를 죽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는 이 교수의 처음 주장(앞의 책 37쪽)은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을 받아들여 수정해야 하지 않는가?

둘째, 종모법 제정의 배경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사실과 무관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 1432년(세종14년) 3월 15일 세종은 태종 때 제정된 종부법으로 인해 부부 사이는 물론이고 부모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현상을 지적했다. 낳은 자식의 신분을 남편 쪽에 따르게 하는 법(종부법) 때문에 여자 노비가 천인의 자식을 잉태했을 때 다시 양인 남자와 관계하여 자식을 양인으로 바꾸려 하는 폐단이 그것이다.

그 폐단을 고치기 위해 종부법을 개정하자는 신하들의 요청은 이미 8년 전부터 계속 있었다. 세종이 주도적으로 발의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이고미사건’에서 보듯이 종부법은 이미 인륜질서를 파괴하는 악법적 요소가 있었다. 여종 이고미는 천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등 패륜 행위를 저질렀다. 대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교수는 “이 법은 원래 발의자 세종이 토로한 대로 비(婢·여종)는 성적으로 문란한 금수(禽獸)와 같아서 그 소생의 부계(父系)를 인정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앞의 책 63쪽), 성도덕과 고정관념의 문제로 몰아갔다. 그러나 거듭 확인해봤지만 세종은 그 말을 한 적이 없다.(‘금수’라는 표현은 세종이 아닌 맹사성의 말 속에 나온다.) 그럼에도 이 교수는 세종이 하지도 않은 말을 애매하게 갖다붙이고 실록 속의 발언자를 뒤섞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이 교수께서 왜 해명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셋째, 양천교혼 관련 주장의 허구이다. 세종이 양반들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해 종모법을 입법했고,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 사이의 혼인을 허용 내지 장려했다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그런데 실록 어디에도 세종이 양천교혼을 허용한 대목이나 법률이 없다. 반대로 종모법을 제정하면서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자 종과 양민의 결혼을 엄하게 금지하는 조처와 지시를 자주 내리고 있다(1432년 3월 등). (이 교수는 ‘양반 재산 증식’과 관련해 자신의 책 어디에 그런 대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억이 안 나시면 자신의 인터넷 강의 ‘조선왕조시대의 양반과 노비 : 세종대왕의 종천법’(2015년 9월 17일)을 다시 살펴보시기 바란다.)

이 교수는 양천교혼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나의 지적에 대해 주간조선 반론 글에서 “양인과 비의 소생을 비 주인의 재산으로 삼게 했으니 양천교혼을 유인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교수의 해석일 뿐이다. 양천교혼을 금지하는 국법을 어겨가면서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가 혼인했다는 사료를 제시할 때만 그 해석이 설득력을 가질 것임은 ‘실증주의자’인 이 교수께서 훨씬 잘 알고 계실 터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교수는 세종시대에 제정된 종모법이라는 원인(cause)과 세종 사후 노비인구의 대확장이라는 결과(effect) 사이를 매개할 결정적 요소, 즉 양천교혼을 사실로써 증명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세종이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듣고 싶다.

2 이영훈 교수는 세종을 “사대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군주로 비판했다. 조선왕조를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여 태종 때까지 지속되던 하늘 제사(天祭)를 폐지하고, 출정의(出征儀)를 거행하지 않는가 하면, 주자가례에 따라 부왕 사망 시 3년상을 국가의례로 정립했다는 것이다. 처녀와 해청(海靑)을 지성으로 바치는 등 “황제를 향한 세종의 성심은” 그치지 않았다고 비꼬아 말했다(앞의 책 156~166쪽, ‘아, 그 완벽한 사대의 예학이여’).

명나라 황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다는 이 교수의 언급은 솔직히 말해 논박할 가치조차 없다. 그런 ‘성심’을 통해 세종이 얻고자 한 게 무엇이었으며, 실제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세종을 ‘사대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그의 억지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세종을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사대전략가라 생각한다. 큰 나라의 것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르고 숭배하는 대외의존적 태도를 가진 자를 사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이와 달리 국가이익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방책으로 지성사대를 했다. 가령 이 교수가 세종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 해청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 교수는 해청, 즉 해동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던 사냥용 매의 진헌을 “대명(大明) 사대에서 조선왕의 성심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1428년(세종10년)의 에피소드, 해청 3연(連)을 이미 바친 뒤에 다시 2연이 잡혔을 때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미 황제를 위하여 잡았으니 즉시 바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다”면서 나머지도 마저 바치게 한 것을 들어 세종의 지성사대를 이야기했다(앞의 책 159쪽).

그런데 이 교수는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 왜 세종이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황제의 마음을 사려 했는가 하는 점이다. 1432년 11월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이번에는 추가로 잡은 해청을 숨긴 신하의 처리 문제가 회의 안건이었다. 그 문제로 명나라 사신이 불쾌해하며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때 세종이 강조한 것은 ‘의심의 실마리(疑端)’였다. 고려 때 “간혹 중국 조정을 속이려다가 발각되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고” 국가적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었다. 조선 건국 후부터 정성으로 사대하여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마당에 공교로운 거짓말로써 의심의 실마리를 만드는 것은 마치 “아홉 길 되는 산을 만들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잘못함으로 공이 깨어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세종이 중국 황제와 사신들의 요구를 지성스럽게 받든 사례는 해청만 있는 게 아니다. 해청 에피소드 바로 1년 전(1427년)에는 ‘말 5000필’을 보내라는 황제의 요청을 따랐다. 중국 사신들의 온갖 요구도 인내력 있게 수용했다. 금강산 구경, 마포 인삼 등 “청구하는 물품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신들의 요구를 세종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왜 그랬을까? 재위 중반부인 1432년(세종14년) 5월 명나라 황제의 요구, 즉 ‘소 1만마리를 압록강 건너 요동지역으로 보내라’는 요구에 대응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이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세종의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소 1만마리를 일시에 보내라는 것은 수용하기 힘든 요구였다. 세종과 신하들은 회의를 열어 명나라의 요구를 그대로 따라야 할지, 감면 요청을 해야 할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라 안의 소들이 마침 병에 걸려 많이 죽은 탓에 보낼 수 없다’고 버텨보자는 제안이 우선 나왔다. 황희 등을 제외한 대다수 신료들은 절반만 보내자는 의견에 찬성했다. 하지만 세종은 ‘농사짓는 데 매우 중요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소를 명나라 요구대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소를 갖추어 바치는 일이 매우 어렵긴 하나, 국가의 안위(安危)보다는 덜 중요하지 않느냐”는 게 세종의 판단이었다.

세종은 실제로 그해(1432년) 7월부터 소 6000마리를 여섯 운으로 나누어 요동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소방(小邦·우리나라)에서는 그전부터 소의 생산이 심히 적고, 또 몸집이 작으나, 황제의 명령을 감히 어김이 있을 수가 없어” 전국의 쓸 만한 소를 어렵게 뽑아서 보낸다는 편지도 보냈다.

세종의 이러한 판단과 조치는 주효했다. 그해 10월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황제는 ‘조선의 탁월한 현왕(賢王)의 판단에 감복했다’면서 지금까지 보낸 6000마리면 족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앞으로는 칙서에 명시된 물건만을 사신들에게 주라는 말도 덧붙였다. 조선의 큰 골칫거리인 사신들의 잡다한 요구를 물리칠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세종은 지성사대로 중국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조선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하던 명나라의 과도한 요구를 줄이고, 양국의 신뢰를 쌓는 데 주력했다. 사신들의 과도한 요구를 차단시키고, 그 파견 횟수를 급격히 감소시킨 것은 보이지 않는 외교적 성과였다(연평균 사신 파견 횟수: 태종시대 2.77회 → 세종시대 1.12회). 한마디로 세종이 하늘제사를 폐지하고, 해청 및 조선 처녀를 정성껏 진헌한 것은 민폐 따윈 무시하고, 제후국 국왕으로 충성을 바치려는 행위가 아니었다. 이 교수가 부정적 의미를 담아 “나는 알지 못한다”고 한 “더 고차의 정략”을 구사한 사람이 바로 세종이었다.

이 교수는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1433년(세종15년) 3월의 어전회의를 언급하면서 이 교수는 세종을 “정치와 인륜을 구분 못한” 왕이라고 비판했다(앞의 책 163쪽). 과연 그랬을까? 당시 조선은 총사령관 최윤덕을 압록강 근처에 대기시켜 놓고, 국경 건너 파저강의 여진족 토벌 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 회의와 관련해 이 교수는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거나 대오를 이탈한 군사를 모두 참(斬·목을 벰)하는 군법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세종이 걱정하자 신하들이 “가장 늦게 도착한 자와 가장 멀리 이탈한 자만 참하자고 하였다”고 인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군대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군사에 대한 세종의 자애는 엉뚱하게 조선왕조의 군대를 허물고 있었는지 모른다”고도 했다(앞의 책 163쪽).

완전히 왜곡된 인용이다. 이날의 실록을 보면 세종은 대신들을 불러 여진족을 토벌하는 군사의 양식 준비와 명령불복종 문제 등을 의논하고 있다. 후자, 즉 명령불복종과 관련해 세종은 “기한 내 도착하지 않은 자와 대오 이탈자를 모두 목을 베면 처벌받는 자가 자못 많을 것이며(受罪者頗多), 반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군령(軍令)이 엄하지 못할 것인데(軍令不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 교수의 왜곡된 인용과 달리, 세종은 처벌받는 군사가 많아지는 문제점과 군령이 엄하지 않게 되는 문제점 모두를 지적한 다음 그 해법을 묻고 있다. 어디에서도 ‘자애로움에 치우쳐 군대를 허무는’ 말이나 의도를 찾을 수 없다. 더군다나 세종 정부의 파저강 토벌은 대승으로 끝났다. 최윤덕이 지휘하는 총 1만5000여 토벌군은 그해 4월 19일 새벽에 일곱 방향으로 기습 공격해 9일간 전투 끝에 여진족 183명을 참살하고 248명을 생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아군 4명 사망). 도대체 이 교수는 어떤 근거로 “세종에게서 외교와 군국을 포함한 내외 정치가 인륜의 논리로 관철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지(앞의 책 163쪽) 심히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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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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