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족과 함께 시원한 야외에 나가서 지글거리며 고기를 구워 먹는 로망을 떠올려본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비단 우리만이 아니다. 오늘날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누구나 기름진 육식을 간절히 선망한다.

이때 고기는 단순히 맛있는 에너지원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 이상의 미묘한 문화적 상징이 담겨 있다.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육식문화의 역사와 본질을 날카롭게 해부한 것이 제러미 리프킨(73)의 ‘육식의 종말’(Beyond Beef·1992)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쇠고기에 대한 모든 것이다. 서양에서 쇠고기는 고기와 거의 동의어다.

리프킨은 수천 년에 걸쳐 인류와 소 사이에 공고하게 다져진 특별한 관계를 추적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형성된 육식문화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한다. 결론적으로 그 어둠을 걷어내려면 육식을 끊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추어 우리말 제목 ‘육식의 종말’은 다소 미진한 느낌을 준다. 리프킨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적극적인 극복을 역설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환경단체들과 더불어 ‘쇠고기 소비 50% 절감 캠페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고대에는 소가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인류 초창기의 의식(儀式)의 많은 부분은 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고대 인류는 소를 신성한 제물로 바치고 그것을 나눠 먹었다. 이로써 그들은 소의 신성과 일체가 되며, 동시에 ‘귀한’ 고기로 허기를 채웠다. 이처럼 인간에게 소는 신성하면서도 세속적이고, 정신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존재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의 신성한 가치보다 실용적 가치가 점점 우세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차츰 유럽에 육식문화가 정착되었다. 그들은 부패한 고기의 역겨운 냄새를 없애기 위해 동양의 향신료가 절실했다. 육류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5세기에 대탐험이 이루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런 흐름의 대표주자가 바로 콜럼버스였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향신료 항로 개척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더 큰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한마디로 무한히 광활한 목초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 이후 몇백 년 동안 스페인의 정복자와 사제들은 신대륙에서 소 사육을 통해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그들은 중앙아메리카에서 시작하여 남북아메리카로 목축 영역을 게걸스럽게 넓혀갔다.

한편, 영국인들은 유럽에서도 가장 육식을 탐닉한 민족이다. 귀족들은 매일 화려한 쇠고기 만찬을 즐겼다. 그 소비가 너무 엄청나서 칙령으로 요릿수를 제한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영국인들은 쇠고기가 ‘활력’을 준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웬만한 영국인이라면 고기 없는 식사는 상상할 수 없었다. 18세기에 수병(水兵) 1인당 1년에 거의 100㎏에 가까운 쇠고기가 제공되기도 했다. 영국이야말로 세계 최초로 ‘쇠고기 상징 국가’가 되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초지에서 쇠고기를 충당했다. 하지만 갈수록 늘어가는 수요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 청교도들이 본격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에 진출하여 서부개척을 개시했다. 그것은 또한 소 사육의 확대과정이기도 했다. 여기에 영국 자본이 가세하여 인디언과 버팔로를 절멸시키며 광대한 미국 서부를 소 사육장으로 탈바꿈시켰다.

해외자본과 더불어 철도 부설, 냉동기술 등이 한데 어우러져 소 산업은 순식간에 최신의 거대산업이 되었다. 처음에는 소몰이꾼들이 소를 동부 대도시 인근의 도축장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이제는 서부 목축지 근방에 대규모 정육시설을 갖추고 부위별로 손질된 신선한 쇠고기를 동부 대도시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유럽대륙에까지 직접 보내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기름이 적당히 끼어 ‘지글거리는’ 고기를 선호했다. 그것은 곧 높은 지위를 상징했다. 영국 출신의 식민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업자들이 주목한 것은 남아도는 옥수수였다. 곡물을 먹인 소는 근육에 부드러운 지방을 축적한다. 그리하여 1900년 이후로는 곡물사육이 일반화되었다. 급기야 곡물을 두고 인간과 소가 다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운송수단, 냉동기술, 해체기술 등은 날로 개량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축산단지가 거대화되어 생산, 도축, 포장, 운송 등이 대량 일관 작업으로 이뤄졌다. 특히 작업 효율화를 위해 고안된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분업, 연속생산, 대량생산 등 근대 제조업의 토대가 되었다. 포드 시스템도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소 산업은 남북 및 중앙아메리카뿐만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아프리카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지구상의 소는 14억마리나 되었다. 전 세계 토지의 4분의 1이 소를 사육하기 위해 사용된다. 소를 비롯한 가축이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 전 세계 곡물의 3분의 1을 먹어치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기 섭취로 인해 혈관질환, 암, 당뇨병 등을 앓는다. 반면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먹을 곡물도 부족해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에는 쇠고기 섭취가 귀족의 상징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런 열망을 반영하여 지난 150년 동안 지구상에는 인위적인 단백질 사다리가 구축되었다. 그 최상층에는 곡물사료로 생산된 쇠고기가 자리 잡았다. 오늘날 쇠고기는 단순히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최고’를 의미하는 문화적 기호가 되었다.

하지만 소 사육은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을 야기한다. 소는 뿔이 잘리고 거세를 당한다. 호르몬제와 항생제가 남용된다. 쇠고기는 더 이상 자연식품이 아니라, 공산품이나 다름없다. 또한 소의 사료 단백질 전환율은 고작 6%에 불과하다. 가축 중에서도 가장 낮다. 그만큼 고기를 얻기 위해 엄청난 곡물이 소비된다. 더구나 첨단화된 도축산업은 생명에 대한 인간의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이처럼 육식문화는 현대의 온갖 병폐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럼에도 육식문화는 여전히 확산일로에 있다. 미국의 분주한 생활양식에 맞춰 탄생한 햄버거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육식에 굶주려 있다. 그들은 인위적인 단백질 사다리의 최상층, 즉 기름진 쇠고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은 결코 충족되기 어렵다. 그것은 환경파괴를 비롯해 지구를 파국으로 몰고 갈 뿐이다.

처음에 인간은 소를 신성(神性)으로 대하다가 차츰 조작가능한 자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결과로 탄생한 오늘날의 육식문화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식품 사슬에서 보다 아래쪽에 위치한 음식을 먹는다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병폐와 모순은 대부분 해결될 수 있다.

우리(한국인)는 얼마 전만 해도 육식을 상상하지도 못하다가 이제는 일상적으로 즐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곡물을 먹여 기름이 적당히 낀 부드러운 쇠고기를 으뜸으로 친다. 그리하여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최고’가 된다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했다. 어느덧 우리도 서양식 육식문화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포로라면 당연히 탈출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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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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