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의 누이가 있었다. 전양지의 처 하씨이다. 경상도 선산부에서 살았다. 1469년 하씨는 남형제의 자녀와 여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친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작성된 상속문서가 ‘전양지 처 하씨 점련문기’이다. 분배된 노비를 헤아리면 모두 9명이다. 그들의 부모가 어떤 신분이고 언제 결혼하여 그들을 출산했는지를 소개한다. *표를 한 것이 9명의 노비다.

1410년경 노(奴) 중생이 양처(良妻) 금장과 결혼하여 1412년에 1소생으로 비(婢) 실대*를, 1430년에 4소생으로 비 옥금*을 낳았다. 1430년대 언젠가 비 실대는 노 불생과 결혼했는데, 1456년에 4소생으로 노 갓동*을 낳았다. 비 옥금은 누구와 결혼했는지 알 수 없는데, 1452년에 1소생으로 노 소산*을, 1463년에 2소생으로 노 복중*을 낳았다. 1423년경 비 만월이 노 복상과 결혼하여 1425년에 비 승덕*을 낳았다. 비 승덕이 양부(良夫) 이의와 결혼하여 1454년 노 오망지*를 낳았다. 1415년경 비 광장이 양부 최도와 결혼하여 1419년 2소생으로 노 최대*를 낳았다. 1410년경 비 기매가 양부 숙량과 결혼하여 1418년에 3소생으로 노 을만*을 낳았다.

2 이상에서 노와 비의 결혼은 모두 7건이다. 노와 비의 결합이 2건, 노와 양처의 결합이 1건, 비와 양부의 결합이 3건이다. 나머지 1건은 비부(婢夫)의 신분을 알 수 없는 경우이다. 15세기 전반 노비 배우자의 신분이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이외에도 참고할 문서가 몇 가지 더 있다. 1429년의 ‘김무 허여문기’, 1443년의 ‘권명리 허여문기’, 1450년의 ‘유의손 형제 화회문기’, 1452년의 ‘이우양 허여문기’, 1460년경의 ‘권심 처 손씨 허여문기’ 등이 그것이다. 모두 1981년 고(故) 이수건 교수가 채집하여 ‘경북지방고문서집성’이란 자료집으로 공간한 것이다. 이래 조선 노비제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하였다. 나도 그에 참가하여 고문서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기쁨을 누렸다. 노비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담은 논문도 작성하였다. 1997년 나는 한국고문서학회가 국사편찬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조선전기고문서집성-15세기편’이란 자료집을 출간할 때 동참하였다. 나의 역할은 위와 같은 상속문서를 교열하고 해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나는 15세기 상속문서에 관한 한 전문가 그룹에 속한다고 자부하고 있다.

3 하씨의 상속문서에서 보듯이 15세기 전반 노비 결혼의 다수는 양천교혼이었다. 7건 중에 4건 내지 5건이 그러하였다. 이 점은 다른 상속문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오히려 더 압도적 비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김무 허여문기’에서 노의 배우자가 밝혀진 경우는 모두 33건인데, 예외 없이 양처와의 결합이었다. 문서에 나타난 상황이 대략 그러한 가운데 상이한 시기의 상속문서를 비교하여 노와 양처의 소생이 문서상의 전 노비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인지를 추적한 연구가 있다. 양영조의 ‘여말선초 양천교혼과 그 소생에 대한 연구’(1986)와 김성우의 ‘조선중기 국가와 사족’(2001)이 그 대표적 성과이다. 양영조는 태종이 제정한, 비와 양부의 소생을 양인 신분으로 돌리는, 종부법(從父法)이 관철된 1414〜1432년의 기간에 양천교혼이 효과적으로 억제되었음을 밝혔다. 김성우의 결론도 동일한데, 나는 분석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서평을 작성하기도 했다(‘역사비평’ 2001년). 어쨌든 15세기 전반 태종과 세종 연간에 양천교혼이 광범했으며 1432년 종부법이 폐지된 이후 더욱 그러했음에 대해선 관련 연구자들의 생각이 한결같다.

4 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졸저에서 1432년 세종이 종부법을 폐지하고 비와 양부의 소생을 노비 신분으로 돌리는 종모법(從母法)을 제정한 것이 양천교혼을 방임함으로써 이후 노비 인구를 증대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대해 주간조선 2516호에서 박현모 교수는 종모법의 제정은 인륜을 바로잡기 위한 도덕적 조처이며, 양천교혼의 허용과는 무관하다는 취지로 반론하였다. 그러면서 나를 비판하기를 “양천교혼을 금지하는 국법을 어겨가면서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가 혼인했다는 사료를 제시할 때만 그 해석이 설득력을 가질 것”인데, “원인과 결과 사이를 매개할 결정적 요소, 즉 양천교혼을 사실로 증명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 같은 비판은 주간조선 2510호에서 박 교수가 이미 행한 것이며, 그에 대해선 내가 주간조선 2512호에서 대답한 바가 있다. 나는 그 대답이 충분했다고 생각하는데, 박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였다. 요지인즉 양천교혼을 사실로 입증할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득불 대중을 독자로 하는 주간지에 걸맞지 않게 위와 같이 관련 사료를 번잡하게 제시하였다. 다시 설명한다. ‘전양지 처 하씨 점련문기’에서 1410년대 이후 양천교혼이 엄격하게 단속되었다면 1465년 현재 9명의 노비 중 합법적 존재는 2명에 불과하게 된다. 종부법이 존속했더라면 양인이 되었을 노비가 9명 중에서 3명이다. 이만하면 ‘사실로서 증명’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5 나는 주간조선 2510호에서 박 교수가 양천교혼이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비판할 때 그가 관련 고문서의 분포와 그에 관한 연구가 어떠한 상태인지를 숙지하는 가운데 기존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런 수준에서 대답했는데, 그럼에도 주간조선 2516호에서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서 문득 깨달았다. 이 사람은 관련 자료와 연구 성과가 어떤 상태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말이다.

실은 조선 노비제에 관해 논문을 쓴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그들을 모두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새로운 논문을 생산하면 빼놓지 않고 읽는다. 다른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자료가 출현하면 고문서학회가 중심이 된 정보의 네트워크가 작동하여 그 사실을 모두에게 알린다. 얼마 전 노비를 1만명 이상이나 소유한 세종의 제8 왕자 영응대군의 처 정씨가 1451년 친정으로부터 받은 노비 재산을 적은 상속문서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입수되었다. 소식을 들은 나는 곧바로 동 연구원을 찾아 동 문서를 열람하였다. 노비는 도합 57명이었다.

이 같은 학술과 정보의 네트워크에 박 교수는 속해 있지 않다. 박 교수는 노비제에 관해 어떤 창조적인 논문을 쓰거나 새로운 자료를 개발한 적이 없다. 그래서 15세기 양반가의 상속문서에 양천교혼이 얼마나 광범한 현상으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엉뚱하게도 관련 사료의 제출을 거듭 요구하였다. 솔직히 말해 노비제와 고문서 전문가들에게 그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은 어지간한 참을성으로는 대답의 글을 쓰기 힘들 정도의 심한 모독이다.

6 박 교수는 노비제에 관해 두 가지를 더 질문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이전에 한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음에 불과하다. 이미 충분히 대답했으니 잘 살펴주길 바란다. 여기서 연구자의 자질과 관련하여 박 교수가 실록의 기사를 오독한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 새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당초 박 교수는 노비가 주인을 고소할 수 없다는 법을 제정한 왕은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라고 주장했으며, 일반 대중에게는 그 점이 널리 알려져 졸저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그 점은 박 교수가 이미 시인했듯이 박 교수의 실록 오독에 따른 실수이다. 아니 실수라기보다 연구자일진대 절대 범해서는 안 될, 다른 무엇으로 변명하기 힘든 일탈이다.

주지하듯이 실록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으며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 많이 끼어 있다. 연구자는 번역본에서 접한 기사를 인용할 때 반드시 한문으로 된 원문을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실록 기사의 번역에도 일부의 오역이 끼어 있다. 번역본은 세종이 노비고소금지법 제정의 건의를 수용한 뒤 “정부의 여러 관청에 내려보내어 이를 의논하게 했다”라고 했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의정부(議政府)에 내려보냈다. 6조(曹)가 이를 논의했다”가 된다. 그래야 당시 정책이 논의되고 결정되는 과정과 부합한다. 그런데 박 교수는 원문을 세밀히 살피지 않은 채 잘못된 번역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는 박 교수가 세종이 동법의 제정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한 가지 빌미를 이루었다. 사소한 트집이 아니라 사료를 인용하는 연구자의 신경은 그렇게까지 예민하지 않으면 안 됨을 환기하는 충고로 들어주길 바란다.

7 박 교수는 나에 대한 두 차례의 반론에서 ‘세종이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따졌다. 홑따옴표이지만 인용부호를 달았으니 졸저를 읽지 않은 사람은 내가 그 말을 한 줄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인용이 아니라 요약과 강조를 위한 부호라 해도 졸저의 세종에 대한 평가를 그렇게 요약하는 것 역시 큰 오독이다. 나는 14세기 후반 이래 노비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대세였으며(졸저 51쪽), 조선왕조 이후 태종이 노와 양처의 결혼을 금하거나 처벌하고 비와 양부의 소생을 양인으로 돌리는 종부법을 결행하는 등 노비제를 봉쇄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그 효력에 한계가 있었으며(52쪽), 이후 세종이 종부법을 폐지하고 비와 양부의 소생을 노비로 돌림으로써 사실상 양천교혼을 방임했으며(63쪽), 이후 단종 연간에 노와 양처의 결혼을 금한 정책마저 폐기되었으며(64쪽), 이윽고 1460년대의 ‘경국대전’ 편찬에 이르러 노와 비의 소생은 그 배우자의 신분이 어떻든 무조건 노비가 되는 악법이 정립되기에 이르렀음을 소개한 다음, “양천교혼을 억제해온 역대의 노비 정책이 이토록 완벽하게 허물어진 것을 세종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다”고 하였다(64쪽). 그러고선 세종이 “양천금혼(良賤禁婚)의 빗장을 풀어버린 공적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고 하였다(64쪽). 이 같은 세종에 대한 평가에서 나는 한마디 한마디의 표현에서까지 더없이 신중했으며, 그 점을 지금도 자부할 수 있다. 어찌 ‘노비 폭증의 원흉’ 따위의 거친 어투를 연구자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8 주간조선 2516호에서 박 교수는 논쟁의 영역을 세종의 사대정책으로까지 넓혔다. 세종이 지성으로 사대한 것은 명 황제의 마음을 감복시켜 공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박 교수의 논설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주간조선이 마련해준 논쟁의 장은 감사하기 그지없으나 이미 학술적 품격을 현저히 상실한 터라 여기서 막을 내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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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논쟁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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