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개봉한 디즈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2’.
지난 7월 개봉한 디즈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2’.

엄마는 긴 출장길에 올랐다. 결혼하고 세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은 쭉 전업주부로 살았지만 기회가 닿아 일을 다시 시작했다. 집을 비운 엄마 대신 아빠가 갓난아이부터 사춘기 소녀까지 세 아이의 양육을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서툰 아빠의 육아는 그 자체로 재난이자 전쟁이다.

여기서 퀴즈, 이 영화의 제목은? 정답은 지난 7월 개봉한 디즈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 2’다. 초능력을 가진 수퍼히어로 가족의 모험담을 다룬 작품이지만 가족이 겪는 어려움은 낯설지 않다.

애니메이션은 양면의 거울과 같다. 한쪽 면에는 판타지와 욕망을, 다른 한쪽에는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가치관을 비춘다. 요즘의 애니메이션, 특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딛고 있는 현실은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의 세계다. PC는 사회적 소수자와 문화적 다양성을 배려하고 편향적·차별적 어휘 사용을 지양하자는 사회적 운동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인권운동과 같은 진보적 행보를 포괄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대대로 디즈니는 보수적이었다. 할리우드의 대표 극우보수주의자였던 월트 디즈니의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전향했다. 진보적인 캐릭터와 메시지로 무장했다. PC스러운 디즈니는 언제 어떻게 등장했으며 어떤 의미일까.

위기의 디즈니, 픽사를 수혈하다

왜 디즈니는 보수의 드레스를 벗고 진보의 전투복을 택했을까. 그쪽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상업 애니메이션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전 연령 관객을 타깃으로 하다 보니 작품 속 메시지와 표현도 단순하고 안전하며 정제된 쪽으로 기운다.

초창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착하게 행동하고 불의에 맞선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사회에 진출한 여성들은 현재의 차별, 미래의 유리천장과 싸우며 스스로 설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정치적 올바름과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애니메이션 업계 내부에서도 디즈니는 위기에 내몰렸다. ‘디즈니 르네상스’로 불리는 전성기를 지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디즈니는 드림웍스와 픽사라는 젊은 라이벌의 등장과 함께 급격히 힘을 잃었다. 변해버린 시대에서 디즈니다운 메시지는 고루하고 낡은 가르침으로 전락했다. 수세에 몰린 디즈니의 선택은 인수였다. 2006년 픽사를 인수한 디즈니는 픽사의 ‘정치적 올바름’을 수혈하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것은 역시 공주였다. 디즈니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 이래로 공주들은 디즈니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백설공주(1937), 신데렐라(1950), 오로라(잠자는 숲속의 공주 1959), 에리얼(인어공주·1989), 벨(미녀와 야수·1991), 자스민(알라딘·1992) 등 ‘최초의 여섯’ 공주들은 오리지널 프린세스라고 불리며 보수적인 디즈니의 여성상을 드러낸다. 비극적인 운명의 장난에 비천한 혹은 억눌린 삶을 살지만 실은 고귀한 혈통과 천성을 타고난 착한 미녀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형적인 이야기는 당대 여성들에게 강요된 ‘여성다운 삶’의 이상향이다.

이후 등장한 ‘뉴웨이브 프린세스’는 디즈니의 여성관이 변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히로인들은 보다 주체적인 여성이다. 아메리카 원주민(포카혼타스·1995), 남북조시대 남장여자 병사(뮬란·1998), 아프리카계 미국인(공주와 개구리·2009) 등 인종과 배경부터 마이너리티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사건과 남성에 끌려다니는 대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라푼젤’(2010)은 픽사의 기술력을 디즈니의 이야기에 물리적으로 결합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은 과도기적 작품이다. 전형적인 미인상을 벗어난 공주 메리다의 디자인부터 여성 위주로 진행되는 페미니즘적인 이야기 구조까지 기존 디즈니 공주 작품들과 차별화를 시도한 작품이지만, 거창한 의도와는 달리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겨울왕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겨울왕국’은 픽사의 올바름을 디즈니에 화학적으로 결합한 결과물이다. 왕자와의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을 정당화하던 공주는 왕자 없이도 완벽한 여왕 엘사로 진화했다. 왕자와 공주의 키스는 자매의 포옹으로 대체됐고 남자 주인공 크리스토프는 오히려 순록 스벤과의 스킨십이 더 잦아서 걱정될 정도다.

‘겨울왕국’ 이후에 제작된 ‘모아나’(2016)는 외모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여자 주인공을 그린다. 여주인공이자 소수부족 추장의 딸인 모아나는 폴리네시아인으로, 완벽하게 마른 몸매인 다른 공주들과는 달리 넉넉한 팔뚝 살과 적당히 굵은 허리를 갖고 있다. ‘모아나’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요소들을 잘 부합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미국의 여성평론가협회는 매해 선정하는 여성영화어워드(Women Film Award)에서 ‘모아나’를 2016 최고 애니메이션 여성 부문 수상작으로 꼽았다.

자신감을 회복한 덕일까. 이제 디즈니는 자신의 공주들을 농담거리로 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내년 초 개봉을 앞둔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 2’ 예고편에서는 여주인공 바넬로피가 디즈니 공주의 전형적인 모습에 대해 농담하는 장면이 미리 공개되기도 했다.

초창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엔딩은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란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제 디즈니의 시선은 결혼 이후의 삶을 향한다. ‘인크레더블 2’에서 히어로 가족은 초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보통의 문제’에 직면한다. 생계에 대한 고민, 엄마의 복직과 부재, 사춘기 딸의 이성친구 고민까지. 거창한 영웅 서사를 받쳐주는 가족의 일상은 작품을 더 촘촘하고 정교하게 만든다. 주체적인 여성상을 넘어 워킹맘의 고충과 감정선까지 섬세하게 그려낸 지점은 한결 더 성숙해진 디즈니를 가늠케 한다.

‘주토피아’(2016)는 디즈니의 가장 실험적이며 진보적인 작품이다. 문명화된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공존하는 가상의 세계를 바탕으로 인종차별과 편견, 더 나아가 역차별에 관한 현대적인 우화를 그려낸다. 디즈니가 동화를 벗어나 복잡다단한 현실 속 문제를 풍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보하는 사회’를 보수적으로 반영

처음의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디즈니는 보수에서 진보로 전향한 걸까.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아니다. 디즈니는 진보로 향하는 사회를 보수적으로 작품 속에 녹여낸다. 시대는 느리지만 확실히 앞으로 나아간다.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당연한 것에서 온당치 않은 것으로 바뀌었다. 예전에 진보적이었던 시각은 지금 보수적인 시각이 될 수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먼저 나서지 않는다. 보편적인 메시지, 전 연령을 위한 해피엔딩, 매력적인 캐릭터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한걸음의 진보를 마친 사회가 다음 진보를 향해 나아갈 때, 이윽고 디즈니는 ‘어제까지의 진보’를 작품에 녹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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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윤 매일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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