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관세청 통관 팀에서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뉴욕에서 금화(金貨)같이 생긴 물건이 천 개 정도 이 회사 앞으로 배송됐는데 확인 부탁합니다”. 뉴욕에서 온 금화라니!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이 해프닝은 CEO부터 팔 걷어붙이고 강조한 ‘스트레이트 토크(Straight Talk)’ 캠페인에서 비롯됐다.

2013년 봄, 전 세계 7만여 직원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CEO와의 대화’ 시간. 전년도 실적을 나누고 한 해 비즈니스 전략을 발표한 미국 본사 CEO는 난데없이 ‘스트레이트 토크’라고 쓰인 동전을 꺼내 들고 입을 열었다. 말하기 껄끄러운 것들에 대해서도 솔직히 꺼내놓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저부터 실천할 테니 여러분들도 제게 스트레이트 토크해주세요!”

금화같이 생긴 그 동전이 바다 건너 날아온 것이다. 한가운데엔 ‘Straight Talk’, 금빛 테두리 부분엔 ‘Let’s Discuss Behavior(행동에 대해 얘기해보자)’라고 써 있었다.

‘스트레이트 토크’라 하면 말 그대로 에둘러 말하는 게 아니라, 곧고 솔직하게 말하는 걸 뜻한다. 회사에선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진솔하게 하는 대화”라고 말한다. 물론 그 대상은 부하직원뿐 아니라 동료, 상사, 상사의 상사까지 포함한다. 이 같은 행동이 조직 안에 잘 자리 잡을 때, 사안의 핵심을 짚어내 꼬인 실타래도 풀 수 있고, 인간관계도 담백하고 건강해지며, 결국 경쟁력 있는 조직문화를 견인한다는 개념이다.

처음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올해용 캐치프레이즈겠거니’ 했다. 한데 아니었다. CEO가 금빛 동전을 들고나와 포문을 연 뒤, 본사 리더십 팀들이 세계를 누비며 스트레이트 토크 경험담을 풀어냈다. 이후 세계 170여개 마켓에선 지사장을 필두로 리더십 팀부터 모여서 우리 조직의 ‘스트레이트 토크’ 수준을 진단하고, 개선점과 대안을 찾아보는 워크숍을 열었다. 직원의 리더십 평가 항목에 “당신의 상사는 스트레이트 토크를 장려하는 문화를 조성하고 있냐”가 포함됐다. 스트레이트 토크가 조직의 기후(climate) 및 개인의 리더십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가 됐다. 회사의 리더들은 곧 너 나 할 것 없이 ‘스트레이트 토크’ 전도사로 나섰고, 다른 마켓을 방문하기라도 하면 ‘○○와의 스트레이트 토크 세션’이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다.

“직장생활하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회사생활에 직언(直言)이 다가 아니다.” 이런 대화가 오히려 자연스러웠던 사람들에겐 엄청난 문화혁명이 아닐 수 없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을 둔 한 회사 동료가 말했다. “남편이 ‘먹고살기에 바빠 죽겠는데 그런 한가한 주제로 반나절씩 임직원 워크숍을 여냐’고 해요. 그래도 이런 것에 시간과 돈, 자원을 투자하는 조직은 좀 부럽다면서요.”

글로벌 회사이다 보니 캠페인을 벌이는 데 있어 나라별·문화별 차이도 고려된다. 캠페인 시작 무렵 본사 동료가 전화를 걸어선 “한국이나 일본 같은 동양문화권에선 이걸 실천하기가 더 어려울 것 같은데 직원들은 어떻게들 받아들이냐”고 물었다. 실제 초기엔 “돌직구 날려서 오히려 조직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산다거나 안 좋은 평가를 받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들이 나왔지만 몇 년 지나면서 체질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원래 돌직구 스타일”이라며 이전보다 더 과감하게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날리는 사람에겐 “제 아무리 훌륭한 직언에도 예의가 빠져선 안 된다”는 스트레이트 토크가 되돌아간다. 스트레이트 토크가 제대로 되려면 상대방의 토크를 진정으로 경청하는 ‘스트레이트 리스닝(Listening)’ 풍토부터 마련돼야 한다는 것도 그룹 토론 끝에 자연스럽게 나왔다. 건강한 조직문화로 나아가는 건 좋지만, 마음속에 있는 하고 싶은 말들을 다 꺼내놓다 보니 일일이 설명하고 논의하는 데에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목소리들도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권 동료들 역시 직장에서의 스트레이트 토크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고 얘기한다는 점이다. 뉴욕에서 온 미국인 동료도 “누가 ‘지금부터 스트레이트 토크 좀 하겠다’고 하면 일단 긴장부터 된다”며 “좋은 얘기 하고 싶고, 갈등 만들지 않고 잘 지내고 싶은 인간 본성에 거스르는 면이 있긴 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쉽지 않은 스트레이트 토크를 회사는 왜 강조하는 걸까. 이그제큐티브 코칭 전문가인 김은주씨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글로벌 조직이 다른 곳과 차별화되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은 결국 문화에서 나온다”며 “실체 없는 문화를 형상화하기 위해선 관찰 가능하고 실천 가능한 ‘행동’을 내세우는데, 글로벌 회사들은 이 면에서 더욱 전략적으로 다룬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직언 행동’이 ‘혁신’과 ‘윤리 경영’이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고 강조되는 제약 업체의 속성에 맞아떨어지는 면도 있는 것 같다. 남과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내서 혁신이 싹틀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해서도, 윤리경영에 있어서 행여 있을 수 있는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대비하는 안전망을 갖추기 위해서도 이 같은 행동 무장은 너무 중요한 전략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스피크 업(Speak Up)’이라는 캠페인을 벌였다는 또 다른 글로벌 제약회사의 한 관계자도 “신중한 위험 감수, 탄력적인 조직 분위기, 우리가 최고로 삼는 혁신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서 스피크 업은 필요한 행동이고 문화”라고 했다.

언뜻 보면 글로벌 회사의 덜 권위적이고 수평적인 조직문화 캠페인 같지만, 그 안에 정교한 디자인과 노력이 숨어 있는 것이다. ‘파워풀: 넷플릭스 성장의 비결’(패티 맥코드 저)이란 책에도 직원들이 서로에게 솔직하게 ‘시작해라’ ‘그만해라’ ‘계속해라’고 피드백 준다는 얘기가 소개돼 있다. 넷플릭스에도 스트레이트 토크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저자인 맥코드는 “극도의 솔직함은 중요한 통찰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반대 의견을 속으로만 갖고 있지 않고 공유하게 한다”고 했다.

직언 캠페인 문화가 업무에서뿐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시댁 식구들이나 자녀 학교 선생님들 대상으로 어려운 얘기를 꺼낼 때, 회사에서 연습한 덕분에 대화가 잘 풀리고 문제가 잘 해결됐다는 것이다. 돌아보니 나 역시 실생활에서 좀 더 세련된 스트레이트 토크를 하고 있고, 상대방의 스트레이트 토크를 대하는 맷집도 더 세진 것 같다. 사내 캠페인이 개인 삶의 행동 변화를 가져와 이 거친 세상을 헤쳐가는 삶의 지혜를 더해주다니, 참으로 회사에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나는 오늘도 자동반사적으로 “스트레이트 토크할 수 있는 문화를 잘 만들자” “나에게도 스트레이트 토크하시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씨 뿌리고 물 주며 공을 들여야 한다. “‘소통을 잘하라’고 하는 것보다 스트레이트 토크 잘하는 게 더 어렵다. 솔직히 스트레이트 토크할 일은 좀 줄어들면 좋겠다.” 오늘 나의 ‘스트레이트 토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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