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해러즈백화점 스테이크하우스의 숯불로 구운 스테이크.
런던 해러즈백화점 스테이크하우스의 숯불로 구운 스테이크.

영국 런던에 있는 해러즈백화점(Harrods Department Store)은 럭셔리 백화점의 대명사이다. 영국 왕실 및 귀족들의 각종 생필품을 공급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에 세계 많은 백화점들의 벤치마킹 대상이기도 하다. 1834년 찰스 헨리 해러즈(Charles Henry Harrods)가 창립하였다. 조선으로 치면 순조 34년 때다. 지금의 위치인 브롬튼(Brompton)에 자리를 잡은 것은 1849년. 170년째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노포다. 1883년 화재로 건물이 불탄 이후 새로 건물을 지으며 지금의 위용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59년 영국의 백화점 그룹인 하우스오브프레이저(House of Fraser)에 흡수되었다가, 1985년 이집트의 거부 모하메드 형제에게 인수되었다. 현재는 카타르 펀드(Qatar Funding)가 소유주이다.

오래된 백화점이기에 이야기도 많다. 1883년 화재 이후 고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창립자의 아들인 찰스 딕비 해러즈(Charles Digby Harrods)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화재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제때 배달하여 고객들의 신뢰를 얻었고,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의 순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서구권의 유명인들을 단골손님으로 확보하며 명성을 얻게 된다. 고객으로 유명한 사람 중에는 문인 오스카 와일드,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비비안 리,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이 있다. 물론 영국 왕실 사람들도 많다. 영국 왕실은 1910년 왕실 인증(Royal Warrants)을 수여하여 이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의 품질을 인증해줬다. 하지만 나중에 인수한 모하메드 알-파예드(Mohamed Al-Fayed)가 이를 다 없애버렸다. 알-파예드는 왕실 인증을 ‘저주(curse)’라고 일갈하며 이를 불태웠다. 이후 매출이 세 배나 증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해러즈백화점의 푸드코트

해러즈백화점에 대한 친숙도는 나이가 든 세대일수록 더 높을 것 같다. 이 백화점이 우리나라의 대중에게 가장 최근에 노출된 것은 영국 배우 이완 맥그리거가 자신을 초청한 모 백화점을 “한국의 해러즈백화점”이라고 불렀던 2012년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997년 이 백화점이 우리나라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것은 세기의 비극적 사고 때문이었다. 당시 이 백화점의 소유주였던 이집트의 거부 모하메드 알-파예드의 아들인 도디 알-파예드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동승자가 영국의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였다. 1997년 8월 31일 새벽 파리에서 이들 커플을 태운 차량이 파파라치의 취재를 피하다 지하도에서 사고를 일으켜 두 명 모두 유명을 달리한 사건이었다. 영국의 자존심인 해러즈백화점을 과거 식민지였던 이집트 출신이 인수한 것도 불쾌한 일인데, 전 왕실 가족 일원의 연애사가 언론에 노출된 것 때문에 불만을 품은 영국 정보기관이 이들의 죽음에 개입했더라는 등의 ‘카더라 통신’, 요즘말로 ‘가짜뉴스(fake news)’가 판을 치면서 해러즈라는 이름이 언론에 자주 등장했었다.

해러즈백화점 1층(ground floor)에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푸드코트가 있다. 우리나라 백화점의 경우 식품부와 푸드코트가 지하에 있는데 이 백화점은 1층에 식품부와 레스토랑 및 카페가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식품부와 푸드코트가 물과 기름처럼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백화점은 1층의 ‘고기·생선·가금류관’에서 홀 중심은 식료품을 팔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닭요리점, 해산물바, 캐비어하우스, 굴바, 스시바, 피시 앤 칩스, 그리고 스테이크하우스가 있다. 즉 식재료를 옆에 두고, 그 식재료로 요리를 하는 식당이 함께 있으니 해산물바는 ‘활어회집’, 스테이크하우스의 경우 ‘정육식당’ 같은 느낌이다.

런던에 처음 갔을 때 이 백화점 푸드코트를 둘러보고 문화 충격에 빠졌다. 스테이크라는 음식이 어느 문화권에서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푸드코트의 선술집 같은 곳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벽을 등지고 요리를 하고 정면과 양옆에 카운터를 만들어 음식을 내는 우리나라 포장마차의 ‘ㄷ자 구조’에서 혼자 또는 둘이 와서 스테이크를 먹는 걸 보고 이방인은 마냥 신기했다. 그 이방인이 드디어 그 자리에 앉아 칼과 포크를 들어보았다. 음식점의 이름은 그냥 ‘스테이크집(The Steakhouse)’이었다.

해러즈백화점 스테이크하우스.(왼쪽) 요리사가 티본스테이크를 톱으로 썰고 있다.
해러즈백화점 스테이크하우스.(왼쪽) 요리사가 티본스테이크를 톱으로 썰고 있다.

톱으로 써는 티본스테이크

푸줏간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100g을 기준으로 판매하는데 호주산 와규, 스코틀랜드, 미국산 프라임, 그리고 애버딘 앵거스 등의 고기가 있었다. 가격은 가장 비싼 호주산 와규가 스코틀랜드산의 세 배인 100g당 40파운드(약 6만원)에 육박했고, 미국산 프라임 립아이는 16파운드(약 2만4000원)였다. 보통의 스테이크는 1인분이어서 200g을 권유하는데, 주문한 티본스테이크는 2인용, 600g이 기본이었다. 애버딘 앵거스는 21일 동안 드라이에이징 방식으로 숙성시켰다고 했다.

주문을 받자 푸줏간 종업원은 냉장고에 걸려 있던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내린 후 고기칼을 들고 익숙한 분량을 썰어 나갔다. 살코기 부위는 잘랐는데 칼이 마침내 뼈에 닿자 칼을 내려놓았다. 우리나라의 정육점에서도 익숙한 그라인더가 옆에 있어서 그걸로 뼈를 자르나 싶었는데, 장갑을 낀 손으로 톱을 드는 것이었다. 너무나 낯선 광경에 넋이 나간 순간 이미 내가 먹을 고기는 잘 잘려 누런 포장지에 싸이고 있었다. 어떻게 먹을 거냐고 해서 늘 그런 것처럼 ‘미디엄 레어’를 주문했고, 종이에는 암호처럼 사인펜으로 알파벳이 쓰였다. 사소한 것이었지만 전통이라는 것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정육식당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려고 일부러 ㄷ자 바테이블의 중간에 앉았다. 부대끼지 않을 정도로 2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규모였다. 주방은 두 명인데, 웨이터는 다섯 명이었다. 언제 또 오겠냐 싶어서 사이드메뉴로 크림시금치, 프렌치프라이, 그리고 샐러드를 시켰다. 소스는 통후추를 주재료로 한 페퍼콘 소스를 주문했다. 지체 높으신 분들을 주로 서빙할 것 같은 웨이터가 해러즈백화점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탄산수를 유리잔에 따라주었고, 그 뒤로 3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주방이 있었다.

이윽고 검은 불판 위에 주문한 고기가 올려졌다. 주문한 고기가 살짝 내려다보일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은 개방형 주방이었다. 웨이터에게 뭐로 굽느냐고 물었더니 숯으로 굽는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우리는 전기나 가스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숯으로 굽습니다. 환기시스템이 좋아서 연기가 바깥으로 전혀 스며 나오지 않습니다. 몇 년 전 환기시스템이 고장이 났는데, 이 넓은 홀 전체가 연기로 가득했어요. 어쨌든 우리는 숯으로 굽고, 환기시스템도 매우 좋아요!” 전혀 재미있지 않은 영국식 설명이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보니 고기가 구워지고 있는 그릴이 눈에 보이는 지척인데도 고기 익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기대했던 그 맛

시간이 지나자 음식이 나왔다. 2인용 티본스테이크는 싸우지 말라고 두 접시로 나뉘어 담겨 있었다. 서로 넘볼 수 있는 중간의 T자형 뼈(T-bone)는 다른 접시에 담겨 나왔다. 스테이크 옆으로는 불에 살짝 그을린 방울토마토가 줄기째 올라가 있었다. 격식을 덜어낸 영국식 풍경을 만들어낸 조경사 랜실롯 브라운(Lancelot Brown)의 정원이 살짝 떠올랐다. 숯으로 달궈진 뜨거운 그릴 위에서 방금 나온 스테이크와 묘한 조화가 이루어졌다. 겉은 바삭하게 타고, 속은 선홍색 핏빛이 살짝 도는 주먹 크기의 스테이크는 마이야르반응(탄수화물이나 아미노산이 열과 반응하여 색과 맛이 변하는 반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뽐내는 것 같았다. 고기는 부드럽지만 무르지 않았다. 육질이 단단하게 잡혀 씹는 맛이 있었다. 산업혁명 시대의 증기기관차처럼은 아니더라도 열심히 저작활동을 하여야 음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기대하던 바로 그 맛이었다.

프렌치프라이도 단단하다 싶을 정도로 기름이 빠져 있었다. 한입 베어 물 때 치아를 감싸는 튀김 속 기름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튀김을 먹으며 담백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매우 생소한 경험이었다. 햄버거를 먹어도 감자튀김은 잘 먹지 않는데, 이 프렌치프라이는 같이 간 사람의 분량을 배려하는 걸 잊게 만들었다. 크림시금치도 다른 곳보다 크림의 양이 훨씬 적었다. 스테이크 시킬 때 사이드 메뉴를 함께 주문하면 고기보다 더한 느끼함 때문에 김치나 동치미 생각이 자주 났었다. 스테이크집에 꼭 있어야 할 콜라나 사이다를 메뉴판에서 찾을 수 없는 게 이해가 갔다. 탄산수에도 별로 손이 가지 않았다.

오로지 고기에만 신경을 써서인지 와인리스트는 매우 단출하고 소박했다. 한 페이지에 큰 글씨로 모든 음료가 망라되어 있었다. 와인은 10종류를 파는데, 가장 비싼 와인 한 병이 96파운드(약 14만원)였다. 맥주는 해러즈 라거 한 가지만 있었고, 콜라나 사이다는 메뉴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차는 해러즈의 14번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만 주문할 수 있고, 디저트도 한 가지뿐이었다. 커피는 아메리카노는 주문이 가능했지만 영국인들이 즐겨 마신다는 플랫화이트는 메뉴에 없었다.

한참을 먹고 나서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눈이 갔다. 늦은 점심시간이었는데 평상복 차림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재킷을 걸친 사람이 없는 걸로 봐서 회사에서 일하다가 잠시 나오거나 백화점 왔다가 들른 것 같았다. 신사의 나라라는 선입견에 재킷을 걸치고 식사하러 갔다가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자진 신고한 셈이었다. 양이나 가격 모두 가볍지 않은 식사였지만 그들에게는 별 무게감이 없어 보였다. 생전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도디 알-파예드도 이곳에 들렀다는데, 평범한 차림으로 바 스툴에 앉아 한 끼 스테이크를 먹었으리라.

주소: 87-135 Brompton Rd, Knightsbridge, London, SW1X 7XL, United Kingdom

전화번호: 44-20-7730-1234

웹사이트 주소: https://www.harrods.com/en-gb/restaurants/lunch-and-dinner/the-steak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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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권 명지대학교 청소년지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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