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호 대장(가운데)과 원정대 4명의 합동영결식이 지난 10월 19일 서울시립대 대강당에서 거행됐다. photo 뉴시스
무엇이 이들의 심사를 이렇게 뒤틀리고 꼬이게 한 것일까. 구르자히말 김창호 팀의 사고 기사 아래 달린 댓글들 중에는 ‘무모하게 위험한 데 갔다가 꼴 좋다’는 식의 조롱을 넘어 공연한 적의까지도 품은 것이 적잖이 보였다. 몇 년 전 박영석의 사고 때는 악플이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생살이가 그만큼 더 팍팍해져서일까. 대원들의 부모나 부인, 혹은 아들딸이 이 댓글들을 안 보았길 바란다.
   
   만약 김창호가 무모했다면, 무모하지 않은 산악인은 아무도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는 등반 대상지 선택부터 실제 등반까지 별나게 치밀하고 조심스러운 스타일이었다. 그는 8000m 14좌를 무산소로 완등하기까지 회복 불능의 손상을 입은 신체 부위가 없다. 그는 무사귀환의 확신이 서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고산 등반 중엔 캠프지의 텐트 천을 뚫고 낙석이 안으로 떨어지는 일도 간혹 발생한다. 김창호는 이런 작은 낙석에 대해서까지 세세히 일지에 기록하며 좀 더 안전한 캠프지 선정 노하우를 모색해온 스타일이었다. 이번 사고는 무모하다는 말이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사고 이틀 전인 10월 9일 원정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동영상을 보면 베이스캠프지는 평화롭고 안온하다. 울퉁불퉁할망정 여기저기 풀도 자라나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평평한 평지에 여러 동의 텐트가 설치돼 있다. 대원 전원이 그중 본부 캠프인 듯한 큰 텐트 안에 모여 건배하고 있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고작 3500m. 그들은 이 ‘안전한’ 곳에서 느닷없는 돌풍으로 사고를 당했다.
   
   네팔 히말라야에서 이런 사고 사례는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천재지변인 이런 위험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면 매년 수만 명이 찾는 히말라야 트레킹 루트는 거의 모두 폐쇄해야 할 것이다. 여대생이 운동화 신고도 올라가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도 해발 4100m이며, 인기 트레킹 루트들은 3500m 이상의 고개를 몇 개씩 넘곤 한다.
   
   등반에서 무모하다 함은 실력이 안 되는 대상지를 오르다가 사고를 당했을 때나 타당한 말이다. 혹은 화제를 모을 욕심으로 철모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뇌손상을 입을 수도 있는 고소에 오르거나 할 때 무모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들이 좋아서 한 등반인데 웬 국위 선양 타령으로 미화하느냐’는 비난조의 댓글도 여럿 보였다. 그들이 좋아서 등반을 해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서 대성한 사람이 있었던가. 크게 성공해서 덤으로 국위 선양까지도 되려면 그것이 좋아서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명성은 상대적으로 미미했으나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을, 손흥민이 축구를 미치도록 좋아하듯 김창호는 등반을 좋아했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 등반이 유난히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축구선수나 야구선수가 죽는 일은 드물지만 등반가는 종종 목숨을 잃는다. 위험은 등반가의 숙명이다. 산악인의 정의가 그렇다. ‘추락의 위험이 있는 벽을 늘 오르려는 사람’이다.
   
   위험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등반이 아니다. 이른바 알피니즘은 200여년 전 태동한 이래로 여러 차례 변형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 대전제를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무슨 연맹이니 하는 조직이 새롭게 의미 규정을 해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산악인들 스스로 그렇게 등반의 흐름을 이끌어왔다. 너도나도 노멀루트를 오르기 시작하면 누군가가 남서벽에 새 루트를 내며 올랐고, 캠프 5~6개를 설치해두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극지법으로 오르면 아래쪽 캠프로 되내려오지 않는 극한의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해버리는 산꾼들이 나타나곤 했다. 등정 자체가 아니라 어느 벽을 어떤 방식으로 오르느냐가 관건이 된 지 오래인 요즘의 등반 사조다.
   
   
   생텍쥐페리의 철학
   
   ‘그래, 그게 알피니즘이라 이 말이지. 그런데 그런 위험한 짓을 왜 하는 거지?’ 댓글에서 실로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궁금해했다.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까지 흥분한 댓글도 있었다.
   
   생명이 위험한 것이 문제라면 쇠울 안의 살기등등한 격투기나 두뇌 손상을 가져오기 일쑤인 미식축구도 비난받아야 한다. 등반도 위험하지만 거기에 증오나 살의는 없으며, 한편이 이기면 다른 한편은 패배감으로 비참해지는 일도 없다. 살 떨리게 위험한 벽 앞에서 대원들끼리는 우애로 뭉치기 마련이며, 난관의 등반이 끝나고 정상에 서면 다 같이 각별한 감동으로 환호한다. 그러므로 등반은 인류가 찾아낸 기발한 감동 창출의 메커니즘이라 할 만하다.
   
   거슬러오르면 등반가의 의지는 아마득한 옛날 안전한 숲그늘에서 벗어나 먹잇감이 떼지어 몰려다니는, 그러나 맹수의 위험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야 하는 초원지대로 처음 나선 원시 인류 그 누군가의 용기에 가닿아 있다. 등반가들은 인류의 이 희귀한 정신 자산을 위험한 벽 등반으로써 다시 날카롭게 가다듬어 우리 사회로 환원시킨다.
   
   외형상 등반은 멀리 떠나는 행위이지만 실은 세상을 향한 애정을 증폭시키고자 하는 시도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사람 간의 정신적 유대에서 찾았던 생텍쥐페리의 철학은 그대로 알피니즘적이어서 많은 산악인들이 애독한다. 칠흑 같은 밤하늘을 홀로 날아가는 야간비행에서 생텍쥐페리는 세상에 대한 애정을 새삼 확인한다. 사막이나 밤하늘을 고산거벽으로 치환하면 바로 산악인들의 이야기다.
   
   등반의 핵심적 의미가 이러하기에 등반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올랐고, 위험하지 않으면 오르지 않았다. 또한 김창호는 스스로 경쟁적 등반에 빠져드는 일을 경계해왔다. 김창호는 “14좌 무산소 완등 기록 자체보다 같이 올랐던 대원들 중 그 누구와도 관계가 틀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더 자랑스럽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그와, 그의 이러한 등반관에 동조해서 함께 올랐던 대원들을 무모하고 자기 취미만 밝히는 이기주의자로 몰아붙이면 곤란하다.
   
   김창호는 언젠가 “정상 너머의 다른 정상을 본다”고 했다. 시인 김현승은 ‘물 없는 저 산에/ 노를 저어 오르는 이만이/ 더 높은 눈으로 더 높은 산을/ 산 위에 바라볼 것이다’라고 읊었다. 극한등반의 철학이 시인의 깊은 사색과 만난 것일까.
   
   그러나 그는 이제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바라볼 높은 산정 너머 더 높은 산의 모습은 이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근거 없고 공연한 악플이 격려와 위로의 선플을 외려 압도하는 판이니 또 누가 그처럼 ‘위험한’ 등반을 하러 나설까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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