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낚시춘추 40주년 인터뷰를 하던 한형주 박사.
해양수산부는 2016년에 우리나라 낚시인구가 767만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세계에서 미국, 일본 다음으로 높은 수치다. 지난해에는 세종대 관광산업연구소와 컨슈머·인사이트 공동조사 결과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해보고 싶은 레저로 낚시가 등산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가을이면 수도권의 서해바다는 주꾸미, 갑오징어, 삼치를 낚으러 온 낚싯배와 가족 낚시인들로 장관을 이룬다. 낚시 예능 프로그램 ‘도시어부’가 동시간대 TV 시청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낚시 전성시대다.
   
   
▲ 1974년 6월 2일 로얄공업 주최 제1회 전국낚시대회가 열린 전남 장흥군 안양저수지. 짚으로 엮은 초가지붕은 영락없는 옛 풍경화다.(낚시춘추 1974년 7월호)

   낚시춘추 창간한 전문의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1960년대 말쯤으로 가면, 우리나라의 낚시인구는 채 10만명도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1년 예산이 200억원에 불과했던 시절이다. 낚싯대 공장이 부산에 처음 생기고 직장인들이 관광버스를 빌려서 주말출조란 걸 막 시작한 그때, 우리나라 최초의 낚시잡지인 ‘낚시춘추’가 창간되었다. 발행인은 출판 쪽에 아무 연고도 없는 40대 초반의 의사였다.
   
   ‘낚시춘추’는 한국 낚시 태동기에 낚시문화의 터미널 역할을 했다. 경향 각지의 낚시터 정보가 교류되고 외국의 선진 낚시기술이 소개되었다. 낚시춘추 필진으로 활약한 문인, 학자, 의사들은 낚시 정책자문과 낚시인 권익보호를 위해 ‘한국낚시펜클럽’과 ‘한국낚시진흥회’를 발족시켰다. 이러한 제반활동에 구심점 역할을 한 사람이 낚시춘추 창간인이자 한국낚시진흥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원파(圓波) 한형주(韓炯周) 박사다.
   
   지난 11월 17일 한국 낚시의 대부 한형주 박사가 타계하였다. 향년 91세. 고인은 1928년 함경남도 신창에서 태어나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서울 동대문구에 개인병원을 개설, 내과와 신경과 전문의로 명성을 떨쳤다. 1968년엔 제주도 서귀포에 ‘풍토병연구소’를 지어 기생충과 풍토병 박멸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연구소는 나중에 ‘서울대학교 풍토병연구소 분원’으로 이름을 바꿔 모교인 서울대학교에 기증했다. 한 박사의 부친 한병만(韓秉萬)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과대학의 전신) 학생으로 3·1 만세운동 때 군중행렬을 이끌다 옥고를 치렀다.
   
   그런 부친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한형주 박사는 일제강점기 말에 중학교 학우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다 함흥도청 고등계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함남중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18세에 함흥 신흥정공립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광복을 맞이한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과에 입학하기 위해 단신 월남한 뒤 분단을 맞아 북에 있는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1·4후퇴 때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관 중위로 임관하였고, 역시 피란 도중 부산에서 숙명여대를 졸업한 부인 김명희(金明姬)씨를 만나 남한에서 비로소 가족을 만들게 되었다. 결혼 후 양수리 59육군병원 군의관 대위로 근무할 때부터 잡게 된 낚싯대는 어릴 때 신고산에서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익힌 낚시의 열정을 되살려줬고, 이후 평생을 낚시라는 취미와 더불어 살았다.
   
   당시 한형주 박사는 서울의 명문낚시클럽인 한양낚시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교유한 조우(釣友)들이 전 국회의장 이재학, 소설가 서기원, 광주의대 손철 박사, 부산 MBC 전무 김종한 등이었다. 그들이 낚시춘추 창간을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1970년대 당시 정계와 의료계, 문단에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형주 박사는 피천득 선생의 애제자로 수필집을 여러 권 발간한 문사이기도 했기에 많은 문인들이 낚시 에세이, 낚시 소설, 낚시 만화 등에 적극 참가하였다.
   
   “전후 경제가 복구되고 국민의 여가활동이 늘어나면서 낚시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는데, 언제 어디로 가서 무슨 낚시를 해야 할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이라 온 국민이 함께 볼 수 있는 낚시 정보지가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출판에 대한 아무 경험도 없이 시작하게 되었다”는 한 박사는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 하나만 꼽는다면 낚시춘추 창간이다. 그 후 나는 전국 낚시터 어디를 가나 칙사 대접을 받았으니까”라고 말했다.
   
   
▲ 1986년 한국낚시진흥회 창립총회.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한형주 박사.

   실향민의 한, 낚시로 달래
   
   당시 낚시춘추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여 서울의 모든 낚시회들이 낚시춘추에 매월 소개되는 낚시터들을 보고 찾아갈 정도였다. 그러나 낚시산업이 발전하기 전이라서 광고 수입이 거의 없었다. 한 박사는 병원 수입으로 6년 넘게 잡지를 운영해오다가 1977년 대학 후배인 정효섭(鄭孝燮) 다락원 대표에게 낚시춘추를 물려주었다. 이후 낚시춘추는 우리나라 최대 낚시잡지로 성장하였고, 현재까지 통권 569호를 발간하며 47년간 매월 전국의 낚시인들에게 발송되고 있다.
   
   잡지에서 손을 놓고도 낚시에 대한 한 박사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1986년 낚시터 환경보호와 낚시인 권익보호, 건전한 낚시문화 계몽을 취지로 ‘한국낚시진흥회’를 설립하였다. 전국의 낚시 명사 61명의 발기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창립총회가 열렸고 2년5개월 후에 체육부 산하 사단법인체로 등록하였다. (사)한국낚시진흥회는 1996년 한강환경관리청과 낚시터 환경오염 합동단속을 벌인 바 있고 1997년엔 낚시면허제 실시에 대한 반대의사를 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사)한국낚시진흥회는 4대 회장 서기원씨(전 KBS 사장) 등을 거쳐 현재는 김정구(엔에스 대표)·정연화(해동조구사 대표)씨가 공동회장을 맡고 있다.
   
   작고하기 7년 전 낚시춘추 창간 40주년 인터뷰에서 한형주 박사는 평생 낚시전도사로 살아온 소회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낚시로 인해서 행복이 뭔지를 알았다. 나에겐 북녘 고향에 부모형제를 두고 열여덟에 삼팔선을 넘어온 뒤로 60년 넘게 망향에 사무친 아픈 세월이 있었지만 낚시가 있었기에 고비마다 별 탈 없이 살아왔다.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 낚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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