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는 방마다 ‘춘풍추상(春風秋霜)’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런 뉴스를 접하며 새삼 떠올려보게 되는 책이 있다. 바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2009)다. 영미권에서는 8만권 정도 발간되었다. 그것도 철학서로는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무려 200만권이나 팔렸다.

더구나 2012년 샌델이 내한하여 공개강연회를 열었을 때, 1만4000석 규모의 연세대 노천극장은 젊은 청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철학 강의를 들으려고 그만한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도 깜짝 놀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뜨거운 관심과 환대를 받았다.

본래 이 책은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며, 인류가 오랫동안 고민해온 고전적 정의론들을 두루 망라한 교양서다. 따라서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정의의 이론과 개념을 폭넓게 이해하는 데 더없이 유익하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열풍에 비해 널리 읽히지는 않았다. 아마 제대로 읽혔다면 이렇게 많이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가 목말라하는 것은 정의론이 아니라, 정의 그 자체다. 그로 인해 이 책은 정의론에 관한 책이 아니라, 마치 정의 그 자체인 것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한때 많은 사람들이 머스트해브(must-have) 아이템으로 이 책을 보란 듯이 소지했다. 그런 어수선함이 지나간 지금이 오히려 이 책의 내용을 차분히 되짚어볼 때가 아닌가 싶다.

사실 요란한 거품을 걷어내고 보면 이 책의 뼈대는 의외로 간단하다. 샌델은 제1장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의 장단점을 살펴볼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행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공리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 미덕과 좋은 삶을 중시하는 공동체주의이다. 그 이후 나머지 장(章)들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들어가며,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를 차례로 검토·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공동체주의를 내세운다.

잘 알다시피, 공리주의는 제러미 벤담(1748~1832)에서 시작된다. 그는 “도덕의 최고 원칙은 가장 큰 행복을 산출해야 한다는 것, 즉 전체적으로 고통을 상쇄하고 난 나머지 쾌락의 양을 가장 크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행복 또는 쾌락이라는 단일 가치를 양적으로 측정하여, 그 총량의 극대화, 즉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공리주의는 심각한 의문을 초래한다. 과연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단일할까. 더구나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이 정당할까. 이런 이유로 샌델은 공리주의가 정의의 기준으로 적합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공리주의는 공공정책 분야에서 비용 대비 편익 분석(benefit-cost analysis) 등의 형태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재개발 사업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다수의 찬성은 소수 반대자의 집도 허문다.

다음으로, 자유주의는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자유지상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다. 자유지상주의(liberalianism)는 시장의 자유를 절대 지지하고, 재분배를 위한 조세정책이나 복지정책을 일절 배격한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선명한 입장이다. 이것은 출발선의 불평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자유지상주의는 자유와 효율성을 앞세워 미국 등에서 강력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존 롤스(1921~2002)가 대표적으로 그의 ‘정의론’(1971)에서 제시한 이론이다. 롤스는 우리 각자의 이해관계나 특수한 처지를 완전히 무시하는 ‘원초적 평등 조건’을 설정한다. 그런 가상적 조건에서 오로지 이성과 양심에 입각하여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유를 희구하되, 자신이 소수나 약자가 되는 경우를 의식하여,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를 포기하고 다음의 두 가지 대원칙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로, 기본적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제공돼야 한다. 둘째로, 사회의 직위와 직책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야 하고, 사회적 또는 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의 입장을 개선시키는 한도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요컨대, 첫째 원칙에 따라 자유를 최대한 향유하되, 둘째 원칙으로 그 틈새를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에 입각해 롤스는 평등을 ‘정당화될 수 없는 자의적 불평등이 없는 상태’로 파악했다. 그의 정의론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샌델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우선, 그는 롤스의 ‘원초적 평등 조건’을 비판한다. 그것이 마치 경험적인 것처럼 포장되었으나, 그가 보기에 실제로는 칸트의 관념적 이성론에 근거하고 있다. 거기서 개인은 철저하게 ‘고립된’ 존재이고, 국가나 공동체 역시 중립적이다. 이에 따라 롤스의 정의관은 중립적·관념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의 비판은 자연스럽게 국가와 공동체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고립된 존재로 보고 국가나 공동체를 중립적으로 여기는 시각은 공공철학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철학은 시민의 탈도덕화를 부추기고,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책임감을 쇠퇴시킨다. 그는 건강한 공동체가 시민의 행복을 지켜준다고 주장하며, 공동체에 대한 연대나 의무를 강조한다. 즉 정의는 공동체를 벗어나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다.

샌델은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론을 주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정의론은 공동체 속에서 필연적으로 존경, 미덕, 좋은 삶 등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쟁을 수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도출되는 미덕이나 탁월함에 대해 합당한 존경이나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이처럼 샌델은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공리주의, 오로지 ‘개인’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배제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시민’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중시하는 공동체주의적 정의론을 제안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는 구체적인 원칙이나 기준을 세우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관점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한 그것은 자칫 공동체 우선주의로 흘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소지가 있다고 비판되기도 한다.

우리는 쾌도난마를 기대하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200만권이나 샀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쾌도(快刀)를 쥐여주기보다 정의가 매우 복잡한 개념이라는 점을 새삼 일깨워준다. 비록 저자가 개인적으로 공동체주의적 정의론을 선호한다고 주장할지언정, 궁극적으로 ‘무엇이 옳은 일인가’에 대한 답은 결코 단정적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의 앞에 한없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뜨거운 도덕감정에 입각해 선과 악을 명쾌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그러나 공동체를 둘러싼 ‘사회적’ 정의는 섣부르게 단정하기 어렵다. 특히 정치세력들이 정의에 과도하게 몰입하면 필연적으로 나만의 정의, 즉 독선(獨善)을 낳게 된다. 그것은 상대를 절멸의 대상으로 여기며, 사회를 황폐화시킨다. 지금 우리에게 춘풍추상(春風秋霜)만큼 절실한 것도 없다.

키워드

#지금 이 책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