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종보 ‘홍매 핀 집 수졸재’. 2014. 캔버스에 유화. 40.9×31.8㎝. 개인
매화꽃이 피었다. 이렇게 미세먼지가 연일 가득한 날에 매화꽃이라니. 경이롭다. 마스크를 쓰고서도 문밖을 나가기가 주저되는 탁기 속에서도 매화는 두려움 없이 속살을 드러낸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잎부터 들이밀며 겨울을 뛰어넘는 여린 꽃의 당당함. 매화는 하나마나한 이유를 들어 걸핏하면 주저앉으려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봄이잖아요. 그렇게 숨어있지만 말고 용기를 내어 봄 속으로 나와보세요. 당돌한 꽃잎의 눈빛에 살짝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겨울의 속박에 꼼짝달싹하지 않던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나는 어느새 탐매객(探梅客)이 되어 매화를 찾아 길을 나선다. 등산스틱을 든 ‘매화클럽’ 회원들이 바야흐로 쏟아져 나오는 계절이다.
   
   
   매화를 아내 삼아 학을 자식 삼아
   
   허련(許鍊·1808~1893)이 그린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매화의 손짓에 마음을 빼앗긴 선비가 탐매 끝에 벗의 집에 당도한 날의 에피소드를 그린 작품이다.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에 실린 이영구(李營丘)의 ‘매화서옥도’에서 기본적인 구도를 참고했다. 작가는 고즈넉한 하루가 무료해 붓장난을 한 것일까. 차분하게 우려낸 먹빛이 담백하다 못해 심심할 지경이다. 계절은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듯 눈 덮인 먼 산은 흐릿하게 형체만 남았다. 서옥 주변에 심어진 고목은 매화나무가 분명한데 그마저도 배경과 비슷하게 그려서인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기야 매화꽃이 원래 그렇다.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꽃인 듯 나무인 듯 무심하게 지나쳐버리기 쉬운 수수하고 소박한 꽃이다. 고혹적인 도화꽃과 살구꽃을 생각하면 매화꽃은 촌색시나 다름없다. 그 수수한 꽃을 보겠다고 선비들은 굳이 탐매의 길을 나섰다. 열렬하게 찬시를 짓고 붓을 들어 그림으로 남겼다.
   
   매화꽃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 선비들의 기록은 꽤 오래전부터 확인된다. 그 대표주자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맹호연(孟浩然)이다. 그는 봄만 되면 매화를 찾아 파교를 건너 설산으로 향했다. 그러지 않아도 소재가 궁해 손을 놀리고 있던 화가들은 맹호연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다투어 붓을 들었다. 16세기의 신잠(申潛), 17세기의 김명국(金明國), 18세기의 심사정(沈師正)이 맹호연의 사연이 담긴 ‘탐매도’를 남겼다. 맹호연이 매화를 찾아가는 모습은 선비가 나귀를 타거나 지팡이를 짚고 추위를 뚫고 나아가는 도상이 전형적이다. 매화꽃 피는 서옥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허련의 ‘매화서옥도’와는 그 갈래가 다르다.
   
   허련이 반한 인물은 맹호연이 아니라 송나라 때의 시인 임포(林逋)다. 매화는 흔히 임포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질 정도로 그는 매화 매니아였다. 그는 벼슬하는 대신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초옥을 짓고 은거했다. 궁벽함에 스스로를 몰아넣는 행위, 자발적인 고립이었다. 집 둘레에는 삼백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다. 결혼은 하지 않고 대신 매화와 학을 아내와 자식 삼아 일생을 보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은 ‘매처학자(梅妻鶴子)’라 부르며 풍류를 아는 시인으로 여겼다. 그는 매화나무 사이를 거닐며 여러 편의 매화시를 남겼다. 그중 ‘산원소매(山園小梅)’에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 위에 비스듬히 드리우고/ 그윽한 향기 떠도는데 달은 이미 어스름’이라는 구절은 두고두고 후대 시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독존 의식도 뛰어난 데다 창작 능력까지 겸비한 임포의 ‘라이프 스타일’은 귀거래를 염두에 둔 모든 선비의 로망이었다. 혼자 살아가야 하는 외로움과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는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마이 웨이’를 선언한 임포는 벼슬아치들의 영원한 우상이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는 더더욱 부러운 당신이다.
   
   그에 대한 소문은 고려시대에 이미 한반도 산골마을까지 당도한 듯하다.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에도 그의 매화가 언급되어 있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 중 한 사람인 장유(張維)는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에서 ‘예로부터 매화에 관심을 쏟은 이들’이 많지만 그중에서 그야말로 “높은 품격과 뛰어난 운치를 보여주며 주객이 서로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영원토록 찬사를 받을 만한 작품이 있다고 한다면 오직 화정처사의 그것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극찬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鄭敾)이 ‘매처학자’와 ‘고산방학(孤山放鶴)’을 그린 것도 임포에 대한 인기도를 말해준다. 그런데 정선의 그림 속의 임포가 학을 데리고 나와 야외에서 매화를 감상하는 모습이 ‘키 포인트’라면 허련의 ‘매화서옥도’는 서재에서 공부하는 선비가 주제다. 같은 인물을 그렸지만 감상 포인트가 다르다. 서재가 중심이 된 ‘매화서옥도’는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김수철(金秀哲), 이한철(李漢喆), 안중식(安中植) 등 19세기 이후의 작가들이 주로 많이 그렸다. 김정희 이후에 ‘매화서옥도’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시대적 배경이 있는 것일까. 여전히 의문이지만 아직까지 속 시원히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다. 그나저나 ‘매화서옥도’의 선비는 서재에 앉아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고 있을까.
   
   
▲ 허련 ‘매화서옥도’. 19세기. 종이에 연한색. 21×28㎝. 개인

   분수를 지키며 사는 집 수졸재
   
   현대작가 설종보의 ‘홍매 핀 집 수졸재’는 ‘매화서옥도’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이다. 화면 가득 붉은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단 홍매는 화엄사 각황전 앞의 홍매처럼 오랜 연륜을 자랑한다. 주먹만 한 꽃봉오리가 흡사 동백꽃처럼 우람해 보인다. 그 자태가 통도사 홍매보다는 더 야무지고 선암사 홍매보다는 덜 수다스럽다. 하늘에 단정한 보름달이 있어 임포의 시 ‘그윽한 향기 떠도는데 달은 이미 어스름’이 이곳에서도 회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봄이라 하나 아직은 찬 기운에 몸을 움츠려야 할 시간에 부부는 홍매의 ‘그윽한 향기’에 취해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어스름 달빛을 실어 댕그렁 소리를 낸다. 그 시간 부부의 가슴에는 오직 어스름 달빛과 홍매의 향기만이 가득할 것이다. 고개를 들어 매화를 쳐다보는 부부의 머리 위로 ‘수졸재(守拙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수졸재는 ‘보잘것없는 것을 지키는 집’이란 뜻이다. 부부의 소박한 살림살이를 짐작해볼 수 있는 명패가 절제된 구도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
   
   수졸(守拙)의 사전적 의미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못난 본성을 고치지 않음’이다. 바둑 초단을 부를 때도 ‘수졸’이라 한다. 수준 높은 고단자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졸’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의외로 깊은 철학성이 내포되어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대교약졸(大巧若拙)’과 ‘대변약눌(大辯若訥)’이 나온다. 큰 기교는 서툰 듯하고 큰 말씀은 어눌한 것 같다는 뜻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교묘한 말(巧言)과 꾸민 얼굴(令色)을 하는 사람치고 착한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약졸과 약눌이 교언(巧言)과 반대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구태여 과장하지 않고 꾸미지 않으며 사는 것이야말로 많은 선비들이 지향했던 정신세계였다. 수많은 선비들은 ‘수졸재’나 ‘수졸당(守拙堂)’을 즐겨 당호나 편액으로 썼다. ‘졸’은 궁색한 처세를 애써 고치려 하지 않고 자신의 분수를 지켜 재주를 부리거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도 포함된다. 입신양명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조선시대에 영조 때의 학자 윤기(尹愭)는 손자가 태어나자 시를 지어 축하해주었는데 ‘선인의 가르침 어기지 않음이 귀하니/ 조촐한 분수 잘 지켜 영화를 사모하지 말아라(克守拙規不羡榮)’고 했다. 손자의 앞날을 축복한 시로 보기에는 왠지 태클을 거는 것 같지만 귀하고 귀한 손자가 행여 명리에 눈이 어두워 인생을 헤프게 살까봐 노심초사해서 한 말일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신익전(申翊全)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행여 자신의 행실이 부모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는 모습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졸렬함을 지키며 세속 왕래 끊어버리고(守拙斷將迎)/ 가난함을 편히 여겨 겨죽에 만족하며/ 적막하게 장막을 드리운 방안에서/ 내내 책상 하나만 마주하였네.’ 졸렬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언제든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충전되어 있는 법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못난 대로 살면 두려울 것 없고(守拙居無懼)/ 분수 지키면 언제나 떳떳하지”라고 했다. 권력이 장땡인 세상에서 분수를 지키는 자의 소중함을 지적한 말이다. 영조 때의 문신 이시항(李時沆)은 자신의 집에 ‘수졸인성(守拙忍性)’ 네 글자를 써놓고 스스로 반성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정희는 만년에 거처한 집을 ‘수졸산방(守拙山房)’이라 했다. 오랜 세월 눈물에 젖은 짬밥을 겨우겨우 삼키며 살아온 사람의 내공이 담긴 이름이다. 구한말의 대쪽 같은 성품의 소유자 이남규(李南珪)는 “늘그막에 할 일이란 졸함을 지키는 일(晩暮自修惟守拙)”이라고 했다. 현업에 있었을 때 ‘끝발’ 날리던 권력의 막강함을 그리워하는 것이 노년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집에서 부자와 형제가 모두 ‘졸’에 ‘몰빵’한 가문도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민성휘(閔聖徽)는 집의 이름을 용졸당(用拙堂)이라 지었다. 그의 아버지는 ‘양졸(養拙)’이라 했고, 형은 ‘수졸’, 아우는 ‘지졸(趾拙)’이라 짓자 졸(拙)이란 글자야말로 ‘우리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심결(心訣)인 듯’ 싶어 ‘용졸’을 쓰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쯤 되면 민성휘의 가문은 호나 편액을 ‘졸’로 도배질한 대표적인 ‘졸부(拙富) 집안’이라 하겠다.
   
   ‘매화서옥도’에 앉은 선비가 하는 공부가 바로 ‘졸부’가 되는 법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졸부(猝富)가 아니라 졸부(拙富)다. 졸렬하고 어리숙하게 사는 길을 지키고(수졸) 길러(양졸) 언제든 자유자재로 쓸(용졸) 수 있는 졸부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의 목적이다. 졸부는 모든 성현들이 시종일관 그 중요성을 강조한 유교 경전의 알파요 오메가다. 매화꽃이 피는 날에는 더욱 그 의미가 새로워지는 졸부. 나도 졸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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