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토투(1978~), 소피 마르소(1966~), 쥘리에트 비노슈(1964~), 이자벨 아자니(1955~), 아누크 에메(1932~), 카트린 드뇌브(1934~), 브리지트 바르도(1934~).

기억 속에 있는 프랑스 여배우들이다. 벽촌(僻村)에서 성장한 까닭에 나는 청소년기에 ‘할리우드 키드’가 될 여건이 주어지지 못했다.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로 외국 영화를 만나는 게 영화 세상과 접하는 전부였다.

소피 마르소, 쥘리에트 비노슈, 이자벨 아자니는 연배가 비슷해서 상대적으로 그들의 영화를 많이 접한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피 마르소보다는 쥘리에트 비노슈와 이자벨 아자니에 더 끌렸다. ‘퐁네프의 연인들’(1991)의 쥘리에트 비노슈와 ‘카미유 클로델’의 이자벨 아자니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내 인생의 프랑스 영화는 단연코 흑백영화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로 ‘남과 여’와 처음 만났다. 주제가도 주제가이지만 여주인공 아누크 에메의 이지적인 모습에 어느 누가 반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연출한 누벨바그 계열의 영화라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다. ‘남과 여’가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면 2016년 파리 여행 중 일부러 영화의 무대인 노르망디 지역의 도빌을 찾았을까.

60대 이후 세대는 카트린 드뇌브와 브리지트 바르도의 전성기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나 나는 두 배우의 영화 중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브리지트 바르도(BB)는 마릴린 먼로(MM)와 함께 20세기 섹스 심벌로도 자자했지만 이 또한 기억이 흐릿하기만 하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영화 자체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이슈의 주인공으로 더 친숙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바르도는 한국인의 화제에 올랐다. 바르도는 동물애호가협회 회장 자격으로 한국의 보신탕 문화를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었다. 우리 정부에서는 반려견과 식용견은 다르다며 궁색한 변명을 하느라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동물애호가협회장으로서 바르도의 기고문은 틀린 것도 없고 문제될 것도 없다. 프랑스와 한국의 경제수준과 식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그후 30년이 지났다. 한국에 반려견이 가족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자리 잡는 문화가 정착되었다. 이와 함께 보신탕집 숫자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최근 카트린 드뇌브가 묵직한 발언으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이른바 성폭력 고발운동인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드뇌브는 프랑스 일간신문 르몽드지에 ‘성(性)의 자유에 필수불가결한 유혹할 자유를 변호한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남성들이 권력을 남용해 여성에게 성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논의의 흐름은 남성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성폭력은 분명 범죄다. 하지만 여성의 환심을 사려거나 유혹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남자들은 여성을 유혹할 자유가 있다.”

이 기고문에는 드뇌브를 비롯해 프랑스 문화·예술계 여성 100명이 서명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역시 프랑스 여배우는 격(格)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미국 지성계는 프랑스 지성계를 따라올 수 없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 권위 있는 신문에 주장을 기고하는 지적 전통, 이런 기고문을 실어주는 언론의 개방성. 서양 지성사를 이끌었던 프랑스는, 역시 프랑스다.

키워드

#편집장 편지
조성관 편집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