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어느 날이었다. 대한전선 도시바 흑백TV로 가요프로그램을 보는데 처음 보는 남자 가수가 나왔다. 훤칠하지도 세련되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외모의 가수가 나와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데도 귀에 낯설지가 않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조용필(1950~) 이야기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신인가수 조용필과 첫 대면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알려진 대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다. 대중문화의 대부분이 중심부 서울에서 먼저 유행한 뒤 동심원처럼 주변부로 전파되어 가는 경향이 있는 것과 정반대였다.

조용필을 세상에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은 ‘촛불’과 ‘창밖의 여자’다. ‘촛불’은 1980년대 초반 정윤희 주연의 드라마 ‘축복’의 주제가로 쓰이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연약한 이 여인을 누구에게 말할까요/ 사랑의 촛불이여 여인의 눈물이여’. 드라마가 끝나갈 때 “그대는 왜~” 하고 조용필이 외치면 TV 앞의 여인들 가슴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창밖의 여자’에서 그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외치자 군웅할거하던 남자 가수들이 초토화되었다.

사람이 가진 것 중 가장 잘 변하지 않는 게 목소리다. 그래서 목소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은 얼굴로 먹고사는 사람보다 수명이 길다. 흔히 이미자와 김지미를 비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가만있어도 목소리는 유지될까. 전성기 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가수활동을 중단한 사람들이 국내외에 꽤 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탁성(濁聲)이 생기지만 조용필의 목소리는 여전히 젊다. 얼마나 정성껏 관리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용필은 언제나 혁신의 최전선에 섰다. ‘단발머리’를 예로 들어보자. 이 노래가 나왔을 때 대중은 기겁했다. 세상에 이런 노래도 있을 수 있구나. 뉴웨이브를 가미했기 때문이었다. 2013년에 발표한 ‘헬로’와 ‘바운스’는 또 어떤가. 누가 예순셋 가수가 불렀다고 생각이나 할까. 조용필은 이렇게 스스로를 끊임없이 혁신해나갔다. 록으로 출발해 트로트의 대륙에서 이름을 얻었지만 그는 정주하지 않고 뉴웨이브·팝발라드·포크의 바다를 항해했다. 가왕(歌王)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오래전 조용필을 심층인터뷰한 기사에서 읽은 대목이 잊히지 않는다. “왜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냐?”는 질문에 조용필은 이런 취지의 답변을 했다.

“나는 결혼생활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음악 생각밖에 없다. 나는 한번 음악 작업을 시작하면 완벽을 추구해 누구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이런 나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나?”

조용필의 노래는 전 세대, 모든 계층을 아우른다. ‘여행을 떠나요’를 보자. “배낭을 메고~”를 부르는 순간 우리는 모두 시원한 계곡에 가 있다.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허공’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래방에서 ‘그 겨울의 찻집’만 찾아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뤄지지 않는 사랑에 괴로워해 본 모든 사람은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에 격하게 공감한다.

20대는 조용필을 ‘바운스’로 기억한다. 이렇듯 20대부터 모든 한국인은 조용필의 노래를 가슴에 품고 저마다의 인생 고비고비를 넘어왔다. 조용필은 1968년 밴드 ‘애트킨즈’로 데뷔했다. 그러니 올해가 50년이다. 그런 조용필이 여전히 무대에 선다는 것은 한국인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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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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