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다가 수능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험생들과 지하철 안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다들 책을 붙들고 마지막까지 한 줄이라도 더 공부하려는 모습에서 비장함이 느껴지더군요. 지하철역 앞에 수험생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오토바이와 경찰 사이드카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수능이 거국적인 이벤트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더군요. 이날 단 하루의 시험으로 젊은이 수십만 명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는 숱한 청춘들이 미래를 난도질당하는 날이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수험생들의 긴장된 표정을 마주 보고 있으려니 ‘인생에 시험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저 역시 시험을 치르면서 성장해왔지만 꿈에서라도 시험을 치르게 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립니다. 항상 자신 없어하던 수학 문제를 시간에 쫓기면서 풀다가 꿈에서 깨어난 적도 있습니다.

숱하게 치른 시험 중 유달리 기억에 남는 시험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무산된’ 중3 가을 중간고사입니다. 그날 새벽에 일어나 라디오를 켜놓고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라디오 프로그램이 갑자기 중단되더니 ‘대통령 유고’라는 긴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유고라? 처음 듣는 말이어서 아버지 어머니를 깨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심각한 얼굴로 “대통령한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하시더군요.

싱숭생숭해져서 학교로 갔더니 교실 안은 이미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안 볼지 모른다”는 말이 돌면서 아이들은 저마다 들뜬 표정이었습니다. 긴가민가하던 ‘시험 취소’가 선생님 입으로 확인된 순간, 교실은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해졌습니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모두의 환호성과 거의 동시였습니다. 교실 뒤쪽에서 뭔가가 박살이 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들 돌아보니 가장 키가 컸던 반장이 묵직한 화분을 들어 냅다 던진 겁니다. 그 친구는 “나라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웃음이 나오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바짝 깎은 머리와 하얀색 칼라가 비죽이 솟은 검정 교복, 그리고 그 친구의 울먹이던 표정 등이 한데 어울려 아직도 약간은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중·고교 졸업과 함께 시험의 부담감에서 조금씩 놓여나는 줄 알았지만 시험은 그 이후에도 악착같이 따라다녔습니다. 카투사로 군에 들어가 평택 훈련소에서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 영어시험을 치른 그날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다들 스팀 열기에 벌게진 얼굴로 낡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단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다 누군가 “여기서까지 이짓을 해야 하느냐”며 외치는 바람에 다같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부담 같은 부담을 안긴 시험은 아마 입사 시험이었을 겁니다. 작문시험이 가장 중요했을 텐데 출제자가 그날 제시한 시험 제목은 아무래도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 시험 덕에 아직 회사 밥을 먹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찌 보면 시험은 평생 끝나지 않는 굴레인지도 모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선택을 강요받는 게 인생이고 보면 인생은 그야말로 시험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수능 수험생들은 시험을 잘 봤든 못 봤든 오늘 하루만이라도 발 뻗고 잤으면 합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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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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