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이 무딘 편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적지 않습니다. 남들이 예민해하는 문제에는 오히려 둔감하고, 다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입니다. 미세먼지도 당초 저한테는 둔감한 이슈였습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스크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 먼지를 잔뜩 마시고 다니면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유난을 떤다’고 삐딱하게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고, KF가 선명하게 찍힌 마스크도 잔뜩 사다놨습니다. 뭐가 저를 변화시킨 걸까요.

몇 년 전 뇌 검사를 받으러 CT 기계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웅~ 하는 소리를 내는 기계에 빨려들어가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떠버린 것이 실수였습니다. 눈 바로 앞이 콱 막혀 있더군요. 온몸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원통형 기계 속에서 내 의지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느끼는 답답함이 가슴을 옥죄어왔습니다. 폐쇄공포라는 것이 이렇게 올 수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시 눈을 감고 온갖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그 짧은 시간을 버티긴 했는데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탈출구가 없다는 절망감에서 찾아옵니다. 요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최근의 미세먼지 습격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들이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 언론의 호들갑이 아니라 요 며칠 진짜 답답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뿌옇게 잠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답답함을 느낀 게 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미세먼지의 ‘굴레’를 영원히 끊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돌덩어리 같은 답답함을 만들었습니다. 그 위기의식이 아마 마스크를 집어들게 했는지 모릅니다.

미세먼지가 끊을 수 없는 굴레라는 느낌은 미세먼지의 정체조차 제대로 모르는 막막함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중국 요인이 몇 %인지, 국내에서는 배출원이 뭔지가 거의 깜깜이 상태입니다. 이번 호에 인터뷰한 차상민 케이웨더 공기지능센터장은 이 깜깜이 상태가 우리 정부의 무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비판하더군요. 한반도에 날아오는 미세먼지 중 몇 % 정도가 중국의 영향인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대책을 세우고 항의라도 해야 하는데, 환경과학원 같은 공기관조차 ‘중국 영향은 30%에서 70% 사이’ 같은 어이없는 말을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는 일본과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작년에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세먼지 해외취재를 시리즈로 내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을 담당했던 기자가 가장 열심히 취재한 부분이 일본의 ‘인벤토리’였습니다. 일본은 수년 전부터 미세먼지 배출량 목록을 꼼꼼히 만들어왔다고 합니다. 우리보다는 중국발 미세먼지의 영향을 덜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신들을 괴롭히는 미세먼지의 정체부터 확실하게 파악한 후 대책 마련에 나섰다는 겁니다. 우리는 대통령 한마디에 갑자기 전 부처가 호떡집에 불난 듯이 미세먼지 대책을 급조해내고 있지만 실효성 있는 대책은 별로 눈에 띄질 않습니다. 이런 정부의 무기력이 절망감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독자님들, 그래도 봄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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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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