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왼쪽)이 지난 9월 23일 중국인민대회의당에서 자칭린 주석과 얘기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이 지난 9월 23일 중국인민대회의당에서 자칭린 주석과 얘기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중국을 다녀왔다. 중국 인민외교학회의 초청으로 지난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4박5일 동안 베이징(北京),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을 돌아봤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는 산둥반도의 웨이하이시(威海市)로 이동해 개인적인 휴식 시간을 갖고 29일에 귀국했다. 이상희 전 내무부 장관, 이원홍 전 문화공보부 장관, 고명승 전 3군사령관, 허화평·이학봉·유흥수 전 국회의원 등 5공화국 인사들이 함께 움직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김한규 전 총무처 장관이 주선했다. ‘21세기한중교류협회’ 회장인 김 전 장관은 기자에게 “전 전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내년 한·중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는 취지로 이뤄진 것”이라며 “내년에는 한국에 총선과 대선이 있고 중국도 내년 10월에 후진타오 주석의 후계자를 결정하기 때문에 올해 중국을 방문했다”고 설명했다.

방중 일정 중 눈에 띄는 것은 9월 23일 자칭린(賈慶林)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과의 면담이다. 자칭린은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 9명 가운데,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뒤를 이어 서열 4위의 상무위원이다. 전 전 대통령 측근 인사는 “원래는 ‘미래 권력’인 시진핑(習近平) 부주석과의 만남을 추진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불발됐다”고 귀띔했다.

안중근 의사 영상물 보고 눈물

전두환 전 대통령과 자칭린 주석은 구면이다. 지난 2007년 방중 때도 만났다. 40분 동안 진행된 면담에 배석한 한 측근은 “두 사람은 주로 수교 후 19년 동안 양국 관계가 획기적으로 발전한 것에 대한 소회를 나눴다”면서 “면담이 막바지로 갈 무렵 전 전 대통령이 ‘영사관 내 탈북자’ 문제를 꺼냈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한국행을 기다리며 주중국 한국영사관 내에서 사는 수십 명의 탈북자 문제를 짚은 거죠. 이들 중에는 4년째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전 전 대통령이 ‘지금까지 영사관 내에 거주하는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송환 처리해주신 데 감사하다. 중국의 국내법 절차가 있는 것은 알지만,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나머지 탈북자들에게도 선처를 바란다’고 말하자 자 주석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중국 측 배석자들을 둘러보더군요. 이런 얘기가 나올지 예상하지 못한 거죠.”

자 주석은 “한국 측의 희망사항을 잘 알았다”며 “법 테두리 안에서 최선을 다해 검토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공식적인 외교 채널로 하기 껄끄러운 얘기를 전직 대통령이 대신한 셈이다. 한·중 간의 여러 현안 중 왜 탈북자 문제를 거론했을까. 수행했던 측근 중 한 명에게 물었다. 그의 설명이다.

“중국으로 갈 때 전 전 대통령과 수행원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탈북자 관련 얘기가 나왔습니다. 단둥에서 대북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가 얼마 전 사망했다는 보도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런 보도를 보고 생각을 좀 하신 것 같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베이징 일정을 마치고 이동한 곳은 헤이룽장성 성도 하얼빈. 항일 운동의 성지다. 일행은 안중근기념관과 731부대 유적지, 안중근 의사의 의거 장소인 하얼빈역을 둘러봤다. 전 전 대통령은 안중근기념관에서 영상물을 보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을 수행한 민정기 전 비서관의 설명이다.

“기념관 일정을 마치고 나중에 식사를 하시면서 ‘팔십 평생에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 건 처음이다. 누가 볼까봐 불이 켜지기 전에 얼른 닦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하얼빈성 당서기와 만찬 자리에서도 전 전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 얘기를 거듭 꺼냈다고 한다. 결국 만찬을 마친 일요일 밤, 예정에 없이 당서기의 안내로 러시아 거리에 남아 있는 ‘모던호텔’을 둘러보러 나섰다고 한다. ‘모던호텔’은 안중근 의사가 의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다.

퇴임 후 3번째 방중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방중은 퇴임 후 이번이 세 번째다. 2001년과 2007년 그리고 이번이다. 세 번 다 중국인민외교학회 초청으로 다녀왔다. 인민외교학회는 실질적으로 중국 정부 외교부서나 다름없는 단체다. 중국 현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전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에 준하는 국빈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번 방중 때도 베이징에서는 댜오위타이(釣魚臺)의 국빈관에서 숙박하고 헤이룽장성에서는 영빈관에 머물렀다고 한다. 시내를 이동할 때는 현지 경찰이 차량 앞뒤에서 의전을 했다고 한다.

중국이 전 전 대통령을 극진히 대우하는 이유에 대해 김한규 전 장관은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는 중국 고사를 들어 설명했다. “중국인은 길 가다 우물물을 마시더라도 누가 그 우물을 팠는지 생각해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의와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한·중 수교는 1992년 노태우 정부 때 이뤄졌지만, 그 기반을 닦은 건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는 것을 중국 정부가 기억하는 겁니다.”

민정기 전 비서관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2007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전 전 대통령을 모시고 중국에 가면 누굴 만나더라도 항상 같은 말을 들어요. ‘음수사원’. 녹음기 트는 것처럼 매번 똑같이 그 얘기를 합니다. 전 전 대통령 재임 시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나 어뢰정 영해 침범 사건을 원만히 처리한 것을 높이 평가하는 거죠.”

전두환 정권 기간에 한·중은 하늘과 바다에서 두 차례 마주쳤다. 1983년 당시 ‘중공’으로 불렸던 중국의 비행기가 납치돼 춘천에 불시착한 일이 있었고, 2년 후에는 중국 어뢰정이 영해를 침입해 들어왔다. 분쟁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 정부의 침착한 대응은 결국 한·중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됐다. 중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열리는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관행을 깨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중 수교 기반 닦았다” 예우

‘음수사원’은 전 전 대통령에게도 해당하는 얘기다. 중국에서 전·현직 고위 인사가 한국을 방문해 전 전 대통령의 서울 연희동 자택에 인사를 오면 식사를 대접한다고 한다. 2001년 방중 시 극진한 환대를 받고 온 후부터다. 근처 식당에서 요리사를 부른다고 한다. 올해 들어서는 장메이잉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허가로 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 식사를 하고 갔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외교 전문에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2007년 3월 20일에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이 포함돼 있다. ‘통일에 대한 한국의 자세(attitude):장기계획 vs 비상사태’라는 제목이 붙은 이 2급 비밀(secret) 문서에는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을 시대별로 분석한 대목이 있다. 그중 일부분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최초의 노력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평화적 통일 방안을 제안하며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고위급 대표단 교환을 제안했다. 비록 회담이 성사되진 않았지만, 그 후 남한 정부는 북한과의 직접적 대결 정책을 지양해왔다.”

전 전 대통령 집권 시기를 대북 정책의 전환점이 된 시기로 평가한 것이다. 전 전 대통령 스스로는 본인의 재임 시기를 어떻게 평가할까. 전 전 대통령은 요즘 자서전 집필을 위해 그동안 쓴 일기를 정리하고 있다고 한다. 30여년간 꾸준히 써온 터라 검토할 분량이 많다는 게 측근의 귀띔이다. 전 전 대통령이 중국을 떠나면서 731부대 유적지에 남긴 휘호는 ‘전사불망(前事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였다. ‘지나간 일을 잊지 않음이 다음 일의 스승이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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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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