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017년 3월 7일 각종 탄도미사일을 동시에 시험발사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북한이 2017년 3월 7일 각종 탄도미사일을 동시에 시험발사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우리는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해 내외에 선포하고 여러 가지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왔다.”

김정은이 올해 초 신년사에서 밝힌 이른바 ‘4불(不)’ 선언의 내용이다. 북한 정권은 지난해 4월 20일 김정은이 주재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4불 선언의 내용이 포함된 결정서를 채택했다.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서에는 “주체 107년(2018) 4월 21일부터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로켓(ICBM) 시험발사를 중지할 것”이라면서 “우리 국가에 대한 핵 위협이나 핵 도발이 없는 한 핵무기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와 핵기술을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김정은이 4불 선언을 강조한 것은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의도라는 것이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은 국가들의 전략에 대해 상당한 연구를 해왔다. 현재 국제사회에서 핵보유국으로 공인받은 국가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이른바 P5 국가들이다. 이들 5개국 이외에 비공인 핵보유국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3개국이다. 이들 3개국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것은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3개국은 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분명하게 미국에 약속했었다.

파키스탄의 덫에 걸린 미국

대표적 사례가 파키스탄이다. 파키스탄은 1998년 5월 28일과 30일 6차례 핵실험을 하면서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당시 유엔 안보리는 파키스탄의 핵실험 이후 비난 결의안만 채택했을 뿐 제재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제재 결의안 채택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본이 파키스탄에 대해 강력한 경제 제재 조치를 단행했다. 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을 선언한 이후 미국의 압박을 버티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핵실험을 동결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도 나서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은 인도 때문이라면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의도나 의지가 없다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천명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공격 등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파키스탄과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파키스탄에 대한 제재를 완전 해제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은 파키스탄이 쳐놓은 ‘동결의 덫(freeze trap)’에 걸렸고, 결국 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이 된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년 11월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자칫하면 북한이 주장하는 ‘동결의 덫’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12일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비판하다가 김정은을 거론하며 “잘 웃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나를 만났을 때 웃으며 너무나 행복해했다”면서 “내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그가 하던 일은 핵실험으로 산을 폭파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입만 열면 “북한이 핵실험과 ICBM 발사를 하지 않았고, 북한 억류 인질들을 데려왔고, 미군 유해도 송환했다”면서 “김정은과 좋은 관계”라고 주장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했다는 ‘성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북한 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보다는 미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켰다고 주장하면서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재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트럼프 리스크(risk)’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동결의 덫에 빠져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인 것이다.

지난 6월 3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악수하고 있다. ⓒphoto 백악관
지난 6월 3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악수하고 있다. ⓒphoto 백악관

“핵 동결이 비핵화 시작점”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판문점 회동 이후 미국 정부에서 핵 동결론이 제기되고 있다. 모건 오테이거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7월 9일 “우리는 명백하고 분명하게 북한 대량살상무기(WMD)의 완전한 제거를 원한다”면서도 “북한의 핵 동결은 우리가 비핵화 과정의 시작점에서 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오테이거스 대변인의 이런 언급은 트럼프 정부가 핵 동결을 시작점으로 하고, 핵무기 등의 완전한 제거를 종점으로 하는 북한 핵 로드맵을 제시한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금기어처럼 물밑에서만 언급했던 핵 동결을 비핵화 과정의 시작점이라고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핵 동결 시작점 발언은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후 트럼프 정부가 고수했던 ‘빅딜론’에서 한발 물러나 ‘단계적 접근법’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판문점 회동 이후 트럼프 정부의 뚜렷한 방향 전환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도 ‘새로운 협상에서 미국은 북핵을 동결할지도 모른다’는 제목의 기사(2019년 7월 1일자)에서 “판문점 회동 4주 전에 트럼프 정부 내부에서 새로운 협상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면서 “그 협상안의 콘셉트는 핵 동결이며, 본질적으로 현 상태를 유지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NYT는 “트럼프 정부는 여전히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목표라고 주장한다”면서 “그러나 북한의 핵 프로그램의 가까운 시일 내 포기라는 최대 압박 정책이 소용없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제한되지만 중대한 첫걸음으로 새로운 접근법을 고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프리 루이스 미국 미들버리 국제학연구소 비확산연구센터 소장도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북한은 핵을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라는 제목의 칼럼(7월 8일자)에서 “트럼프 정부는 공식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받아들였다고 인정하진 않았고 이를 부인할 것”이라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폭탄에 대한 걱정을 멈추고 이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인식을 피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루이스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 회담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핵화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면서 “지금까지 트럼프 정부가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반복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변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연합뉴스는 백악관의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정부가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전면 폐기(full closure)와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동결(complete freeze)에 동의할 경우 12〜18개월 동안 석탄과 섬유 수출 제재를 유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2019년 7월 11일자) 이는 영변 핵시설 폐기와 핵 동결을 대가로 북한의 주요 수출품인 석탄과 섬유의 수출 제재를 일정 기간 유예해주는 사실상의 제재 완화를 말한다. 영변 핵시설 폐기는 모든 건물이 폐쇄되고 모든 작업이 중단되는 것을, 핵 프로그램 동결은 핵분열성 물질과 탄두를 더는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소식통은 “만약 북한이 속임수를 쓴다면 제재는 스냅백(Snap back·위반 행위 때 제재 복원) 형식으로 다시 이뤄지게 된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또 백악관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핵 동결에 따른 대북 제재 유예 이외에도 사실상의 종전선언인 ‘평화선언(peace declaration)’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조약의 형태가 아니고 미·북이 더 이상 무력 분쟁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사실상 한국전쟁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미·북 간 연락사무소 개설도 검토 방안의 하나라고 전했다.

북한 핵협상을 총괄하는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왼쪽)과 스티브 비건 대북특별대표. ⓒphoto 미 국무부
북한 핵협상을 총괄하는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왼쪽)과 스티브 비건 대북특별대표. ⓒphoto 미 국무부

석탄·섬유 수출 제재 유예 방안 검토?

트럼프 정부는 일단 북핵 동결론과 이에 대한 대가로 제재 유예를 하는 방안에 대해 부인하고 있다.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 7월 11일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에게 물어봤더니 한국 언론의 보도는 완전히 틀렸고,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비건 대북특별대표는 그동안 ‘유연한 접근’이라는 방안을 추진해왔다는 점에서 트럼프 정부가 북핵 동결에 따른 대가로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비건 특별대표가 지난 6월 30일 한국에서 워싱턴DC로 돌아오는 국무장관 전용기에서 기자들에게 “북한이 대량살상무기(WMD)의 완전한 동결을 취할 경우 인도적 지원과 인적 대화의 확대, 그리고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 설치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비건 특별대표는 또 “우리는 비핵화 전에는 제재 완화에 관심이 없다”면서 ‘선(先) 비핵화-후(後) 제재완화’라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 회동 직후 “제재는 유지되지만 협상의 일정 시점에(at some point) 어떤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점을 볼 때 미국이 제재 완화의 시점을 놓고 다소 유연성을 발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대선 국면에서 내세울 수 있는 외교 치적이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에서 궤도를 수정, 핵 동결로 현상을 유지하면서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을 없애는 쪽으로 ‘골대’를 옮길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제시한 동결의 덫에 빠질 경우 자칫하면 북한을 파키스탄처럼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핵 동결에 대해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과 전직 관리들은 비핵화의 최종 상태가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핵시설의 폐기가 아닌 동결은 사실상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해주는 것이라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조셉 윤 전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핵 동결 자체는 목표가 될 수 없다”며 “이를 수용하는 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윤 전 대표는 “동결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무엇을 동결하고, 어떻게 검증하느냐에 있다”면서 “영변 외 모든 핵 시설에 대한 신고가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버트 매닝 애틀랜틱 카운슬 선임연구원은 “북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파키스탄과 같은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이라면서 “북한은 일부 핵폭탄을 계속 보유할 수만 있다면 일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거나 폐기하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과거 북핵 6자회담에서 핵시설 폐기에 합의를 해놓고도 북한이 사찰단을 허용하지 않아 검증에 실패했다”면서 “영변 핵시설 전면 폐기와 모든 핵 프로그램 동결에 대해 검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이 2018년 4월 20일 핵과 경제 병진노선 종료를 선언했다는 내용의 노동신문 1면.
김정은이 2018년 4월 20일 핵과 경제 병진노선 종료를 선언했다는 내용의 노동신문 1면.

“동결은 가장 더러운 단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핵 동결에서 그치려 할 경우 미국 내에서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 의회는 북핵 동결과 이에 따른 반대급부에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 의회는 지난해 말 ‘아시아 안심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법에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북한의 비핵화(CVID)가 협상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라는 내용이 명시됐다. 이 법은 또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와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명시된 핵과 미사일 개발 등 불법 활동에 북한이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 때까지 대북 제재를 계속해서 부과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라고 못 박았다.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주자들도 한목소리로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바이든 전 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합법성을 부여했다”면서 “북한 비핵화는 공유된 목표”라고 강조했다.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반대할 것이 확실시된다. 볼턴 보좌관은 NYT의 핵 동결론 보도에 대해 “논의해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루이스 소장은 “볼턴의 노여움은 이해할 만한 것”이라며 “그동안 북한과의 협상에서 ‘동결’은 가장 ‘더러운 단어’였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경우 일본이나 대만도 핵을 개발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개헌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북한이 핵보유국이 될 경우 이를 빌미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 일본의 극우강경파는 당연히 북한에 맞서 핵을 개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틀림없다. 대만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무력통일 위협에 맞서기 위해선 대만에서도 핵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월등한 군사력에 대응하려면 대만으로선 핵무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도 강력하게 반대할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주적인 이란이 북한과 핵·미사일 거래를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정·재계 주요 요직에는 유대계 인사들이 포진해 있고 미국 역대 정부는 이스라엘의 입장을 존중하고 지지해왔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경우 이란도 북한처럼 핵보유국이 되려는 야심을 보일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한국이 북한 핵의 인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핵 있는 평화’는 가짜 평화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은 한국 국민들의 생사여탈권을 김정은의 손에 맡기는 꼴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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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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