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주단포목전 모습.
서울 주단포목전 모습.

1906년 1월, 조선인 기업가들로 이루어진 사상 최초 경영인 단체 ‘한성상업회의소’가 설립된다. 발기인 대표 박승직은 1909년 상임위원을 맡는다. 이에 앞서 그는 1900년 12월에 성진감리서의 주사에 임명된 바 있다. 그는 다시 1905년 4월 중추원의관에 임명된다. 중추원은 1894년에 제정된 내각의 자문기관이었으므로, 그는 양반 신분을 되찾게 된 셈이었다. 한성상업회의소는 뒷날 경성상업회의소, 대한상공회의소로 발전해 나아간다.

박승직은 1907년 8월에 이르러 공익사(共益社)를 세운다. 공익사는 서울 종로상가의 최인성·김원식·최경서 등 42명의 우두머리 객주 출신 거물급 포목상인들이 1만원씩을 출자해 익명 조합으로 출발한다. 일본인 중간상인들을 배제하여 경영을 빠르게 넓혀 갈 수 있었다. 그 무렵 중국 상인의 세력이 강하게 몰려오자 일본 3대 방적회사(대판방적·삼중방적·금포제직)는 1906년 7월 삼영조합이라는 판매동맹체를 결성한다. 판매는 삼정물산주식회사가 전담했다. 삼영조합 결성은 조선 포목상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해 9월 조선 포목상인 90명은 창신사(彰信社)를 조직, 대항에 나선다.

박승직은 창신사보다 공익사로 삼영조합에 맞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공익사는 동업조합 같은 조직으로 조선 포목상인들의 집결체였으므로 중국 상인이나 삼영조합의 세력을 오히려 당당히 압도할 수가 있었다. 공익사는 일본 무역회사인 이토쓰의 중개로 종방(鍾紡)제품을 수입했다. 삼영조합의 판매활동을 독점한 삼정물산주식회사는 이미 조선 땅에 정치 및 경제적 세력을 드넓게 구축하고 있었으나, 면포 수입에 있어서는 공익사에 눌리고 말았다. 공익사가 삼정재단의 주력회사인 삼정물산주식회사를 면포 수입에서 이겼다는 사실은, 조선인 종로 상인의 잠재세력을 안팎으로 과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공익사는 1914년에 이르러 주식회사로 조직을 개편, 자본금을 50만원으로 늘렸다. 다른 포목상들이 파산할 때 조선 상인 집결체인 공익사의 이런 빠른 성장은 인상적인 일이었다.

번창한 공익사는 인천·평양·강경, 중국에서는 봉천(심양)·장춘·하얼빈에 지점을 열었고, 직물과 석유를 수입하는 한편 쌀·콩·쇠가죽을 수출했다. 박승직은 한산·서산 등 7개 저포 산지들을 돌아다니면서 개량 저포를 만들도록 해 수출하기도 했다. 그가 저포 개량에 약 30만원을 들였다거나, 백정 수백 명을 명월관에 초청해 쇠가죽 공법을 강습한 일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상인들까지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조선일보 1936년 1월 10일자) 한편 이토쓰로부터 파견된 다카이 헤자부로가 전무로 유임되었다. 이처럼 공익사에 대한 이토쓰의 영향력이 커졌으나, 박승직을 사장 자리에서 밀어내지는 못했다. 1940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로 들어가 면직물 배급제를 실시하며 공익사는 유명무실해지고, 박승직은 이사장직에서 물러난다.

박승직의 사업 가운데 독특한 것이 1920년대를 풍미했던 박가분(朴家粉)이다. 면직물과는 동떨어진 이 박가분은 처음 박승직의 부인 정정숙이 집에서 부업 삼아 만들기 시작했다. 일찍 결혼해 두 차례 부인과 사별하고 1905년 마흔두 살에 세 번째로 맞아들인 열아홉 젊은 아내가 정씨 부인이다. 정씨 부인은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살리못골(입정동)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날따라 살리못골 할머니는 무슨 일을 하는지 몹시 바빠 보였다.

“대체 이 가루는 무엇인가요? 참 고와 보여요.”

정씨 부인은 할머니가 작은 한지 봉투 안에 정성스럽게 담아 싸고 있는 흰 가루가 무엇인지 여태껏 몰랐었다.

“분가루라는 거야. 요샌 여염집 아낙들도 귀티 나게 보이려고 다들 이 분가루를 쓰고 있어. 그래서 나도 돈이 좀 될까 해서 만들고 있네.”

살리못골 할머니는 만드는 방법을 낱낱이 일러주었다. 먼저 납(鉛)을 끓여서 생기는 서리 모양의 가루를 긁어모았다. 그런 다음 짚재 위에 벽지를 깔고 그 위에다 긁어모은 가루를 얹어 그늘에 말렸다. 그늘에 말리는 작업은 거의 방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완전히 마르면 뽀얀 분가루가 되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주먹구구식 과정이었다. 살리못골 할머니는 분을 팔아보려고 몇 군데 상점에 가지고 갔는데 하나같이 봉투에 담아선 팔 수가 없다면서 가는 데마다 퇴짜를 놓는 바람에 그만 접을 생각을 하고 있노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정씨 부인은 자신이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곰곰이 했다. 그것이 그즈음 불황으로 힘들어하는 남편을 돕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정씨는 수량이 많지 않은 만큼 화장분을 만들어 상점 단골에게 사은품으로 주자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불황기에 다른 상점들은 포목 값도 깎아준다던데 화장분을 사은품으로 주자는 아내의 이야기였다.

“허, 당신 별 신통한 생각을 다 했구려.”

박승직은 젊은 아내가 대견하고 귀엽다는 듯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죠? 그렇지만 우리 여자들에겐 입는 것 못지않게 얼굴 화장도 아주 중요하단 말이에요.”

정씨는 남편으로부터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낸 다음 안채에 공방을 마련하고 분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웬 방물장수가 찾아와 분을 팔게 해달라고 생떼를 썼다. 방물장수는 사은품으로 만든 이 화장분이 여성들 사이에선 이미 소문이 자자하다며, 자신도 오다가다 벌써 여러 곳에서 주문까지 받아놓은 상태라고 밝혔다. 박승직은 먼저 분 몇 봉지를 거저 주고 방물장수를 돌려보냈다. 분이 그렇게나 인기라니 뜻밖이었다. 그는 곧 결단을 내렸다.

“이 화장분을 대량으로 만들어 팔 작정이오. 포장지도 화장분에 어울리도록 화려하게 꾸밀 거요. 우리 상점의 지점만 하더라도 전국에 어디 한두 군데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박가분’이었다. 상표 이름을 어여쁘게 지어야 한다고 아내는 한사코 바랐으나 박승직의 판단은 달랐다. 무엇보다 신뢰를 중요시해 그처럼 이름을 지었다. 1916년 어느 봄날이었다.

서울 장안 여성들의 화제가 된 박가분은 금세 박승직 상점보다 더 유명해졌다. 박가분 제조본점은 1918년 특허국으로부터 상표등록증을 교부받아 어엿한 제조업체가 되었다. 1920년에는 여직공만 30여명을 둘 만큼 규모가 커졌다. 한창 때는 하루에 20갑들이 상자 500개씩 팔려 4000여원의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박가분은 1920년대 불황기의 박승직 상점에 만만치 않은 돈줄이 되어 주었다. 정정숙은 박가분의 개발로 많은 돈을 벌어 고향 경기도 광주에 토지를 사들였는데, 뒷날 박승직 상점이 자금난에 빠졌을 때 이 토지를 팔아서 살렸다. 하지만 1920년대 끝 무렵 일본에서 고급 시세이도 화장품이 밀려들면서, 재래 화장품 원료인 납에 유독 성분이 들어 있다고 알려지자 과감히 생산을 멈추었다. 그러나 박가분 덕분에 박승직 상점은 몇 차례 위기를 맞으면서도 슬기롭게 극복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여파로 온 세계 경제가 불황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조선 경제도 몸살을 앓았다. 박승직 상점도 매출이 뚝 떨어져 위기를 맞았다. 토지를 팔아 위기를 넘기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했다. 1925년 2월 박승직은 박승직 상점을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공익사에서 빌린 차입금 4만6000원에서 1000원을 감액하고, 거기에 박승직 상점 자산 1만5000원을 합쳐 자본금 6만원의 주식회사로 발족했다. 그의 뛰어난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한 다카이 헤자부로 등 일본인들도 주주로 참여했다.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은 온 세계로 번져나갔다. 불황의 깊은 골은 일본을 거쳐 조선까지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1930년 박승직 상점도 최악의 적자를 기록, 직원들의 상여금은 물론 주주들에게 배당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박승직은 세계대공황 시기에 오히려 사업을 넓혀 나갔다. 점포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영국과 일본의 수입면직물 판매에 이어 조선 면직물 판매에도 뛰어들었다. 이때 조선에서는 경성방직주식회사와 조선방직주식회사가 세워졌는데, 박승직은 이들 회사에서 생산되는 면직물을 공급받아 위탁 판매했다. 이 두 회사에서 생산되는 면직물은 일본 상품과 비교해 경쟁력이 있었다. 이처럼 공격적인 경영으로 박승직 상점은 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29~1930년에 적자를 보았으나 1931년에는 전년도의 적자를 메우기에 충분한 이익을 남겨 안정을 되찾았다. 1932년에는 전년도보다 두 배나 되는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1933년 박승직은 일본 쇼와기린맥주 이사로 참여하게 된다. 이때 박승직이 기린맥주와 맺은 인연으로 광복 후에 그의 아들 박두병이 기린맥주 관리지배인을 맡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두산그룹 OB맥주의 모태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박승직으로서는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되는데, 그가 기린맥주의 이사로 참여하게 된 경위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다음처럼 추측해 볼 수 있다.

조선의 기린맥주 대주주는 일본 2대 맥주회사의 하나인 쇼와기린맥주였다. 기린맥주는 처음부터 조선에 분공장을 세우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혀 뜻대로 되지 않자, 따로 법인체를 만들어 서울 영등포에 공장을 세웠다. 이때 기린맥주의 이사로 조선인 2명이 참여하는데, 바로 김연수(삼양사 설립자)와 박승직이었다. 그들이 가진 주식은 200주씩에 지나지 않았다. 1941년 박승직 상점 도매부 이름을 미키상사로 바꾸고, 기린맥주 대리점을 개설해 맥주의 위탁판매를 미키상사가 겸하게 된다. 박승직은 1932년 봄 경성고상을 마친 장남 박두병을 조선은행에 입사시킨다. 관리가 되는 길을 바라지 않고 조선은행에 보낸 것은 가업 계승자가 되고 가산의 수호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했기 때문이다. 1936년에 이르러 박두병은 조선은행을 그만두고 박승직 상점의 전무로 취임한다.

서울 송파 나루터 인근의 옛 장터.
서울 송파 나루터 인근의 옛 장터.

제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섬유업체는 모두 군복 생산에 동원되었고 면직물은 수출입 통제를 받았다. 강력한 소비 통제로 모든 물자를 배급하고 면직물도 1인당 저고리 2마, 치마 2마 반으로 전표를 만들어 배급했다. 이렇다 보니 박승직 상점도 더는 장사를 이끌어 나갈 수가 없었다. 1943년 박승직 상점 도매부는 문을 닫는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박승직은 상점에 쌓여 있던 많은 상품을 모조리 매각 처분했다. 상품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 혼란한 사회에서 가격이 폭등해 큰 이익을 얻겠지만, 그는 한낱 이익을 좇기보다 국민을 위하는 진정한 상인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광복이 되었다.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연지동 박승직의 집에 쇼와기린맥주주식회사의 자치위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한국인 최대 주주 박승직에게 쇼와기린맥주의 경영관리 지배인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박승직은 이를 받아들여, 서른한 살 장남 박두병에게 기린맥주회사를 맡겼다. 그 뒤 1952년 5월 한국 정부로부터 기린맥주를 불하받아 동양맥주주식회사를 창업한다. OB로 불려온 동양맥주가 박승직·박두병이 설립한 두산그룹의 주력 기업이 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남하하던 1950년 12월, 눈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논두렁 밭두렁 장바닥 경영철학으로 조선인에게 상인정신을 일깨워 준 박승직은 광주읍 탄부리에서 눈을 감는다. 박승직은 민족의 비극 6·25전쟁 중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가난한 보부상으로 조선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누빈 배오개 거상, 조선 거상이 되어 한국 최초 100세 기업인 두산그룹의 주춧돌을 다진 거성이 마침내 떨어진 것이다.

박승직은 생전에 아들에게 “정치에는 관여치 말고 오로지 가업에 충실하라”는 가훈과 젊은이들에게 강조한 여덟 교훈을 남긴다.

첫째, 노력하면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뀐다. 둘째, 창의적인 연구만이 비약의 길이다. 셋째, 인생도 경영도 단순명료한 원리원칙이 좋다. 넷째, 아는 것도 실행해야 의미가 있다. 다섯째, 현장에서 땀 흘려야 성공한다. 여섯째, 지도자는 재능보다 덕을 갖춰라. 일곱째, 이타심을 기르면 시야가 넓어진다. 여덟째, 인과응보 법칙을 알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

1991년 3월 14일 밤 10시경 경북 구미시 구포동 두산전자의 페놀 원액 저장탱크에서 파이프가 터져, 15일 아침 6시까지 30톤의 페놀 원액이 낙동강 지류인 옥계천으로 흘러들었다. 조사결과 두산전자는 1990년 10월부터 페놀이 다량 함유된 악성폐수 325톤을 옥계천에 무단방류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두산그룹 박용곤 회장이 물러나고 환경처장관이 경질되었으며, 대구 시민들은 두산 측에 물질적·정신적 피해에 대해 170억100만원(1만3475건)의 배상을 청구했으나 두산은 그중 1만1036건, 10억1800만원만 배상하고 정신적 피해나 확인이 어려운 물질적 피해는 배상하지 않았다.

2005년 7월 17일 오후, 두산그룹 본사 회장실에 두산그룹 경영진 15명이 모였다. 박용곤 그룹 명예회장(박두병의 장남), 박용성 회장(3남), 박용만 부회장(5남) 등 3세 경영인과 박정원 부회장(박용곤의 장남) 등 4세 경영인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박용곤 명예회장은 ‘박용성 회장의 그룹경영’을 발표했다. 박용성 회장은 ‘가족의 뜻’에 따름을 답했고, 나머지 가족들은 박 명예회장의 결정을 추인했다. 두산그룹 경영권이 박용오 회장(2남)에서 박용성 회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자리에 박용오 회장 측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전쯤 박용오 회장 측에서는 “두산산업개발을 계열분리해 달라”는 주장을 했다. 두산산업개발 경영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두산그룹을 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박용오 회장 측이 갖고 있는 두산산업개발 지분은 0.7%에 지나지 않아 가족회의에서 단번에 거절당하고 만다.

자신의 명예회장직 박탈에 반발한 박용오 명예회장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박용성 회장과 박용만 부회장 등이 그동안 비자금 수천억원을 유용하고 해외밀반출을 해온 것이 자신에게 적발되자, 둘이서 공모해 일방적으로 자기를 회장직에서 내쳤다고 주장했다. 박용오 명예회장 측이 다른 형제들의 비자금 구축 등의 내용을 담은 투서를 검찰에 넘겨줌으로써 ‘비자금 조성’ 파동에 휩싸여, 두산은 낙동강 페놀 사건 이후 또다시 최대 위기를 맞는다. 시정잡배도 삼가는 골육상쟁 투서밀고사태를 만들어낸 한국 최고(最古)의 경제가문 형제들은 결과적으로 박승직의 유지를 내팽개쳐 국민의 신의를 저버리고 한국 최악의 경제가문으로 추락하고 만다.

어찌 저세상 매헌 박승직의 노호와 탄식이 하늘을 찌르지 않았으랴.

박승직이 공익사를 운영할 때이다. 의견이 서로 엇갈려 격렬하게 삿대질까지 하며 곧 회사가 깨질 듯 위기에 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박승직은 그때마다 이렇게 말하며 사태를 다스렸다.

“사업에 영원한 적은 없다. 다만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장사는 돈인데 돈 다툼에 집착하면 자신을 망칠 수도 있다. 서로 이익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라. 상대의 말이 이치가 통하지 않더라도 그 속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피지 못하면 원한만 깊어질 뿐이다. 어처구니없게 보이는 일이라도 자세히 생각해 보라. 이치가 통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마음을 가다듬고 깊고 넓게 생각해 보라. 실제로는 별것 아니었음을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미국의 4대 상속부자 가문은 록펠러, 멜런, 듀폰, 핍스이다. 세계대공황을 맞아 거세게 타오르는 미국인들의 분노에 포위되어 있던 재벌들은 혈로를 뚫어 살아나야만 했다. 이들은 20세기에 들어서자, 본격화한 신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외풍에 직접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재산마저도 모두 최고관리자들이 운영하는 신탁에 맡겨버린다. 이 덕분에 ‘4대 상속가문’의 전체 재산은 1930년대 20억~50억달러에 그쳤지만, 1990년대에는 500억달러 이상으로 늘어났다. 엄청난 부의 증식을 이루면서도 사회적·정치적으로 비판 질시 대상에 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 재벌들처럼 경영권 골육상쟁을 벌이지도 않는다.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계열사와 협력업체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을 물려주기 위해 편법과 불법 수단을 쓰지 않으니 정부나 시민단체와 힘을 겨루지도 않는다. 그 대신 거액을 대학과 사회에 기부해 국민의 찬사와 존경을 받는다.

한국의 재벌 2세들은 조상이 만고풍상을 겪으며 이루어낸 가업의 정신과 부와 명예의 고마움을 저버리고, 형제끼리 재산 싸움으로 난장을 벌여 국민을 크게 실망시키기 예사이다.

박승직의 통탄무비 노호가 귓전을 때린다.

“이놈들아 정신 차려!”

고정일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고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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