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츠시카 호쿠사이, ‘후카쿠 36경’ 중 ‘붉은 후지산’, 1831년경, 다색판화, 15.6×22.7㎝, MOA미술관, 시즈오카
가츠시카 호쿠사이, ‘후카쿠 36경’ 중 ‘붉은 후지산’, 1831년경, 다색판화, 15.6×22.7㎝, MOA미술관, 시즈오카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은 두 점이 알려져 있다. 한 점은 붉은색 바탕을 배경으로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한 점은 녹색과 파란색이 두드러진 자화상이다. 두 작품 모두 불안한 색조와 거칠거칠한 붓 터치 속에 고갱과의 불화 때문에 귀를 자른 화가의 광기가 담겨 있다. 쏘아보는 듯한 눈빛과 꼭 다문 입술에는 철저히 고독하게 살다간 한 사내의 외로움이 묻어 있어 이 그림을 한번 본 사람은 쉽게 그를 잊지 못한다. 그만큼 고흐의 작품은 인상이 강렬하고 개성이 강하다.

녹색과 파란색이 강조된 자화상을 들여다보면 뒷배경에 이상한 그림 한 점이 붙어 있다. 우키요에(浮世繪·일본 풍속화)다. 배경이 없었더라면 인물이 훨씬 더 돋보였을 텐데 그걸 모를 리 없는 고흐가 굳이 그 효과를 반감시켜 가면서까지 배경에 이 그림을 붙여 놓았다. 왜 그랬을까. 이 작품에서는 우키요에가 한 장이지만 ‘탕기 영감’에서는 정도가 더 심하다. 여섯 장이나 되는 그림이 조각보처럼 붙어 있다. 이쯤되면 고흐가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그려 넣은 이유가 매우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키요에가 어떤 그림이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흐가 일본 그림을 자신의 그림 속에 간접광고처럼 집어넣었을까.

일본의 산 하면 곧바로 후지산(富士山)이 떠오른다. 후지산은 외국인에게 일본을 상징하는 산으로 각인되어 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가 그린 ‘붉은 후지산’은 일본에서 지역 명소로만 알려진 동네 산을 전 세계 사람들이 찾고 싶어하는 산으로 화려하게 데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평소 일본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식집에서 한번쯤 기모노를 입은 미인의 모습과 함께 후지산을 그린 이 그림을 봤을 것이다. 그만큼 ‘붉은 후지산’은 흡인력이 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일흔을 조금 넘겼을 때 제작한 작품으로 ‘후카쿠 36경(富嶽三十六景)’ 중의 일부다. 후카쿠(富嶽)는 후지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리즈는 일본인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후지산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그린 우키요에로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구도와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돋보이는 명작이다.

뜬구름 같은 세상을 그린 그림

우키요에의 한자음은 ‘부세회(浮世繪)’다. ‘뜬구름 같은 세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끊임없는 전란과 고통 속에서 근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부질없이 떠다니는 뜬구름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늘 아래 놓인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똑같이 무너진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진리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강한 것도 약한 것도, 고운 것도 추한 것도 때가 되면 예외 없이 낡고 부서진다. 별도 나이가 들면 우주 속의 먼지로 사라지는데 사람의 일생이야 오죽하랴. 인생도 바람결에 떠다니는 뜬구름 같다. 인생이 이렇게 덧없고 무상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如夢幻泡影),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은데(如露亦如電)’.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상한 세상에서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은 어차피 쓸모없는 짓’이다. 차라리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즐겨야 한다.

이것이 일본인의 미의식이다. 그들이 계절마다 ‘벚꽃과 반딧불, 단풍’을 찾아 맹렬하게 여행지를 찾아나서는 것도 ‘눈앞에서 덧없이 지고, 작은 빛을 잃고, 선명한 색을 빼앗기는’ 찰나의 아름다움 속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고 안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덧없는 세상이기에 순간에서 영원을 찾겠다는 것이다. 우키요에 속에 가로등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의 가벼운 날갯짓과, 절정의 순간에 불빛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생명체의 격정이 포개어 담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열도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江戶時代·1603 ~1867)에 만들어진 풍속화라고 해서 ‘에도에(江戶繪·에도 그림)’라고도 부른다. 에도는 도쿄(東京)의 옛날 명칭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가 쇼군(將軍)의 자리에 오른 후 만든 신도시다. 그는 ‘덴노(天皇)’가 머물고 있는 교토(京都)를 떠나 황무지나 다름없는 에도에 바쿠후(幕府)를 설치하고 관료기구를 장악했다. 바쿠후의 하부에는 조닌(町人)이라는 상인들이 그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이때부터 덴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1889)으로 권력을 다시 잡을 때까지 명목상으로만 최고 수장일 뿐 정치와 행정에는 일절 간여할 수 없었다. 황도(皇都)인 교토는 전통과 문화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반면 신도시인 에도는 문화의 불모지였다. 건설현장이나 다름없는 신도시에는 외지에서 온 남자들로 득실거렸다. 혼자 있는 남자들이 많다보니 즉석 음식이 인기를 끌었고 유곽과 가부키 극장 같은 독특한 문화가 발달했다. 상업적인 풍속화인 우키요에에 유녀(遊女)들과 가부키 배우들, 그리고 음란한 춘화(春畵)와 기괴한 귀신 이야기가 주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에도시대의 풍속을 반영한다. 대부분의 우키요에가 이 범주 내에서 그려졌다.

가츠시카 호쿠사이라는 거장이 등장하면서 우키요에 세계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다. 일본 열도의 아름다움을 판화 속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에도 막부는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산킨코타이(參勤交代)라는 제도를 만들어 지방의 다이묘들을 일정 기간 동안 에도에 와서 머물도록 했다. 대신 고카이도(五街道·에도를 기점으로 한 5개의 주요 도로)를 정비하고 슈쿠바(驛站)를 설치하여 이동하는 데 불편을 최소화했다. 도카이도(東海道), 나카센도(中山道), 고슈카이도(甲州街道), 오슈카이도(州街道), 닛코카이도(日光街道) 등의 고카이도를 따라 처음에는 다이묘 행렬이 지나다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과 순례객, 그리고 여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유녀와 가부키 배우 대신 자신이 여행하면서 본 풍경을 소재로 선택하게 된 것은 이런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뒤를 따라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1797~1858) 같은 천재작가가 등장해서 서정적 울림을 주는 풍경 판화로 그 맥을 이었다.

19C 유럽의 자포니즘 열풍

유럽인들이 일본을 알게 된 것은 도자기를 통해서였다. 일본에서 전단지나 신문지처럼 가볍게 취급된 우키요에는 귀한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포장지로 사용되었다. 요즘 우리가 택배를 보낼 때 물품 사이에 신문지를 끼워 넣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작 유럽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도자기가 아니라 포장지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세기 중반, 일본 미술에 대한 호기심과 이국적인 취미로 ‘자포니즘(Japonisme)’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반응은 광적이었다.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그리는 데 지쳐 있던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 미술에서 발견되는 ‘비대칭적이고 양식적이고 풍성한 색채’에 혼을 빼앗겼다. 대담한 구도와 선명한 색채도 매력적이었다. 가츠시카 호쿠사이는 일본을 후지산의 나라로 알리는 전령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 속에 일본을 상징하는 병풍, 부채, 기모노, 도자기, 족자, 우키요에 등의 알레고리를 경쟁적으로 그려 넣기 시작했다. 화가들의 스펙트럼도 넓었다. 드가, 마네, 모네, 르누아르, 로트렉, 루소, 에곤 실레, 클림트 등 19세기를 살았던 많은 작가들이 우키요에에 심취했다.

그중에서도 고흐는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그는 우키요에를 단순히 그림의 배경 일부로만 집어넣는 데 만족하지 못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에도 명소 100경(名所江戶百景)’을 유화로 모사할 정도로 심취했다.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의 배경에 우키요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다.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심각한 광기에 빠져 산 고흐 또한 당시 모든 인상파 화가들처럼 그림의 형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 장의 그림 속에는 의외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처음 만난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가. 격식을 갖춘 행동 너머의 배경을 잘 살펴보시라. 얼굴 표정과 손짓, 말투와 언어, 입고 있는 옷과 걸음걸이 등 그가 하는 모든 행동 속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방식과 전 생애가 담겨 있다. 숟가락 들고 밥 먹는 모습 속에도 그 사람의 일상이 투영되어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모습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굳이 점쟁이가 아니라도 상대방에 대해 금세 파악할 수 있다. 상대방의 ‘백그라운드’를 알고 나면 상황 파악이 안돼서 주책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