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어차피 돈(treasure)과 피(blood)와 눈물(tear)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은 한국인이 치러야 할 대가이다.”
-존 하지(J. Hodge)
하지(왼쪽)와 연해주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
하지(왼쪽)와 연해주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

같은 사물을 놓고서도 생각에 따라 실체가 많이 바뀔 수 있다. 한국 현대사의 논쟁 가운데 미·소 공동위원회가 바로 그렇다. 1945년 12월 26일에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보면 조선에서의 임시정부 수립(제1조),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제2조), 신탁통치의 협의(제3조), 2주일 안에 미·소 공위의 개최(제4조)로 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와 신탁통치를 협의한다’고 되어 있지 어디에도 신탁통치를 곧 실시한다는 대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는 ‘5년의 신탁통치’라는 단어만 크게 들렸다. 그러한 구상을 내세운 미국에 대한 원망이 분출했다. 이후로 한국의 이념 논쟁은 ‘미국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라는 어이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과정에서 좌우익의 적과 동지로 갈라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라는 한 무장(武將)이 있었다.

미국 일리노이주 골콘다(Golconda)라는 마을의 한 고아원에 소년 존이 들어왔다. 1893년 6월 12일에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부모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존(요한)은 흔한 세례명이라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중간이름(middle name)인 Reed(갈대)였다. 성격이 거칠어서 유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는지 아니면 천성이 본디 유순했는지 이름을 지어준 보모(保姆)의 심중을 알 길이 없다. 성은 하지(Hodge)였다. 성장한 소년은 교사가 되고 싶어 남(南)일리노이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교사가 되지 않고 다시 일리노이주립대학에 진학하여 건축학을 공부했다. 대학을 마친 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1917년 포트 셰리든(Fort Sheridan)에 입소하여 학군단(ROTC) 훈련을 마친 다음 소위로 임관되어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주로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에서 근무했다.

전후(戰後)에 귀국한 하지는 1921년에 미시시피주립대학 학군단 교관으로 군사학을 강의했으며, 육군보병학교(조지아), 육군참모대학(메릴랜드), 육군대학(펜실베이니아), 전술비행학교(앨라배마)를 마칠 만큼 군인으로서의 역량을 키우는 데 노력했다. 그는 1942년에 준장으로, 1944년에 필리핀에서의 전투 중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미국사단(American Division)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이때 그는 난징(南京)학살의 주역인 일본군 6사단을 격파하고 부상해 상이기장(傷痍記章·Purple Heart)을 받았으며, 1945년에 오키나와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일본군 점령 아래에 있는 도서들의 탈환을 위해 편성된 24군단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5군단장으로 전보되었다가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군 3군사령관을 맡았다. 1952년에 대장으로 진급한 그는 육군지상군사령관을 끝으로 1953년에 퇴역하여 1963년 워싱턴에서 숨졌다.

하지는 전형적인 무골로서 전쟁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지휘관으로서의 냉철한 판단과 전선에서 항상 병사들과 생사를 함께함으로써 부하 병사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정글 전투의 권위자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장발(長髮)이어서 자신의 머리를 짧게 깎았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도 6㎝ 길이 이상의 두발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유언비어를 엄중히 경계했으며, 장교는 병사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대 중국의 오자(吳子)는 부하의 종기에서 고름을 빨아 충성을 얻어냈지만, 하늘 같은 장군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때 그 졸병의 기분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알 만하다. 그런 성품으로 그는 ‘군인 중의 군인(Soldier’s Soldier)’이자 ‘태평양의 패튼(Patton of the Pacific)’이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는 14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하지는 1945년 9월 9일 9만1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했다. 하루 전인 9월 8일 인천항에 미군의 선발대가 입항하자 미군을 환영하려고 인천보안대원과 조선노동조합원이 연합국 깃발을 들고 행진하였다. 이때 질서유지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이 발포하는 바람에 노동조합 위원장 권평근(權平根)과 이석우(李錫雨)가 즉사했고, 중상자와 경상자 10명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두고 그때나 지금의 좌익들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양민을 학살했다”고 비난했다.

항복 문서의 서명은 9월 9일 오후 3시45분,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거행되었다. 미국 측에서는 7함대사령관 킨케이드(T. C. Kinkaid) 제독과 하지 중장이 서명했고, 일본 측에서는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와 고츠키 요시오(上月良夫) 제17방면군 사령관, 야마구치 기이치(山口儀一) 진해경비사령관이 참석했다. 아베 총독은 육군대신과 총리대신을 지낸 전형적인 무장이어서 하지는 그에게 적대감과 함께 무인으로서의 동류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은 항복 문서를 조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는 여전히 아베 총독에게 직무수행을 허락한 데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베는 9월 12일이 되어서야 해임되었다. 당초 하지는 정부의 인계를 순조롭게 진행시키고자 아베 총독을 공직에 그대로 있게 한 다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교체하려고 했으나 한국인의 정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의 진주와 점령 정책을 둘러싸고 ‘소련군은 해방자였고 미군은 점령군이었다’는 주장이 좌파에 의해 제기된 적이 있으나 정확히 말하자면 남북한 모두 점령군 사령관(Commanding General of the Occupational Army)이었다. 다만 태평양사령부가 한국의 국민에게 보내는 ‘포고령 제1호’가 고압적이었고, 북한에 진주한 제25군단 사령관 치스차코프(Ivan M. Chistiakov)의 호소문이 노회한 정치군인답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커밍스(B. Cumings)와 같은 수정주의자들은 하지가 “미숙한 냉전의 전사(a premature cold warrior)”였다고 비난했지만 강골(强骨)의 군인이 우익적 사고에 젖었다는 것이 허물이 될 수는 없으며, 점령군의 사령관이라고 해서 그가 한국인의 적이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 한국의 국제법적 지위를 보면, 한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국민이 없는 땅(no-man’s land)이며 정부가 없는 진공 상태(governmental vacuum)”라고 군정은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미국의 군부는 세련되지 않은 몇 명의 정치 장교들로 한국의 군사적 지배가 가능하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는 신생독립국가의 점령사령관으로서 국가 창설이라고 하는 역사적 과업에 소명의식과 선의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군인이었지만 초기의 군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군정이 겪은 가장 큰 애로는 그들이 한국의 실정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쟁성이 작성한 ‘지리부도: 한국편(Terrain Handbook: Korea·1945)’이 전부였고,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선교사나 그 자제들만이 한국어를 이해하고 있었다. 군정 요원으로서 뒷날 조지타운대학의 교수가 된 맥도널드(Donald MacDonald)는 “한국에 상륙할 때 도쿄에서 아마도 ‘브리태니커’라고 기억되는 어느 백과사전에 실린 한국 관계 항목을 얻어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읽었다”고 필자에게 증언해 주었다.

이 당시 미국의 대한(對韓) 인식은 70여년 전의 신미양요(辛未洋擾·1871)의 그것에 비하여 더 나아진 것이 없었다. 얼마 뒤 한국전쟁 출병에 나선 정훈교관은 건국한 지 180년밖에 안 된 국가의 장교 주제에 “한국은 미국에 비하여 900년 뒤떨어진 야만국”이라고 일러준 것이 실상이었다. 미국은 “한국이라는 나라야말로 독립할 자격이 없고, 무리하게 독립을 한다면 한국의 정치 상황은 200년 전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에 있는 미군이 두려워하는 단어로 ‘~ea’로 끝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diarrhoea(설사)’ ‘gonorrhea(임질)’ ‘Korea(한국)’라고 했다.

하지가 겪는 어려움은 언어의 장벽으로 인한 의사소통의 문제와 이로 말미암은 오해였다. 한국인이 읽을 ‘포고령’이 일본어로 쓰였다는 것은 그 당시의 정황을 잘 설명해 준다. 언어의 오해로 빚어진 대표적 사건이 곧 ‘고양이 파동’이었다. 이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면, 일본인이 행정과 산업의 현장에서 모두 떠나고 이에 대치될 만한 인물로는 친일 부역자들밖에 없는 1945년 11월의 상황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잘 알고 있던 그는 일본인을 기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그로서는 현재의 일본인과, 한국인의 반대편에 서서 일했던 부일 협력 경찰 가운데에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았다. 한국인은 이러한 부일 협력자들을 일본인과 똑같이 “고양이 같은 종족(the same breed to cats)”으로 여기고 있다고 그는 푸념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인이’ 친일파를 고양이처럼 여긴다는 뜻이었다. 이 말이 와전되어 “하지 장군이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과 똑같이 고양이 같은 종족들이라고 말했다”고 소문이 났다. 미국에서 그 말을 전해 들은 이승만은 “내가 빨리 돌아가 하지를 혼내주겠다”고 말했다. 귀국하여 진상을 알아본 이승만이 사과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한번 잘못 전달된 하지의 누명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소통의 어려움을 절감한 하지는 영어 사용자를 선호했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민당(韓民黨) 계열을 중용하면서 결국 ‘통역 정치(government of, for, and by interpreters)’라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서 예비회담(1946년 1월 16일~2월 6일)을 거쳐 1차 회의(3월 20일~5월 9일)가 덕수궁에서 열렸다. 미국 측 대표단장인 아널드(A. Arnold) 소장과 소련 대표단장인 슈티코프(T. Shtycov) 상장이 공동 의장을 맡았다. 아널드는 육사 출신으로서 미 육군 풋볼팀의 센터와 가드로 활약했고 임관해서는 육사 풋볼팀의 코치를 맡았으며, 예일대학의 학군단 단장을 거친 엘리트 장성이었다. 회의는 미국의 용맹한 매파와 ‘총도 쏘아본 적 없는 소련의 정치 군인’의 지모의 싸움이었다. 청년 장교 슈티코프는 서른아홉 살이었고, 아널드는 그보다 열여덟 살이 많은 쉰일곱 살의 노장이었다. 아널드는 주먹으로 탁자를 짚은 채 “내가 겪은 33년의 군대 경험에 따르면…”이라는 식으로 슈티코프의 기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수행하면서 미국은 소련에 견주어 세련되지 못했고 정치적이지도 못했다.

회담은 임시정부의 구성과 탁치 문제에 대한 협상 대상으로 누구를 초청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었을 때 하지는 “운명에 대한 냉소적인 체념”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1년여의 휴회 기간(1946년 5월 10일~1947년 5월 20일)을 거쳐 2차 회의(1947년 5월 21일~10월 18일)가 속개되었을 때에도 다시 협상 상대로 초청할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의 대표 문제로 격돌했다. ‘공동 성명 제11호’의 합의에 따라서 협의 대상 단체의 접수가 시작되었다.

1946년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 스티코프 수석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하고 있다.
1946년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 스티코프 수석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하고 있다.

남한에서 협상 대상자로 신청한 정당·사회단체들은 463개나 되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회원 수는 모두 합쳐 7000만명이었다. 당시 한국의 인구가 2500만명이었고, 1946년 말 현재 남한의 인구가 1930만명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정당·사회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성인 인구가 통상 전체인구의 40%를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1000만명의 성인 인구가 가입한 회원 수가 7000만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모든 성인이 7번 정당·사회단체에 가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비록 허수(虛數)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여기에 여성 참여의 비율이 매우 낮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허수의 정도는 다시 두 배로 높아진다.

이러한 과열 현상은 소련이 보기에 우익의 ‘몸집 불리기’ 같았다. 소련 대표단은 모스크바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은 동시에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또한 반대하는 무리이므로 초청 대상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결사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했더라도 협상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점에서는 미국의 논리가 허약했다. 그리고 결사의 자유라는 명분만으로 우시장 대표까지 나서서 임시정부의 구성과 통일을 논의하겠다고 우긴 것은 온당한 요구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분파 상황과 논리를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바라보면서 소련이나 미국 모두 미·소 공위는 처음부터 되지 않을 일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소 공위가 실패한 후 하지 중장은 “우리는 영원히 분리된 남한(단독정부)을 지향하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기정의 사실이다. 나는 소련이 그들의 지역을 매우 강력하게 공산화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두 지역을 결합시킬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내전(內戰) 없이 두 지역의 결합을 달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라고 개탄했다. 그는 한국 문제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한국을 재건하는 어느 단계에서 처절한 피의 대결(동족상잔)이 일어나리라고 확신했다.

당초에 미·소 공위가 개최되었을 때만 해도 그 주도자나 한국민에게는 일말의 희망과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글의 결론으로 누가 판을 깼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한국인의 자주적 통일 역량, 특히 당시 지도층의 정치적 미숙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국내 정치 세력은 통일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우선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우익들은 미군과 제휴하여 남한에서 장악한 주도권을 고수하고자 자율정부 수립이라는 명분 아래 신탁통치 반대를 내세웠다. 찬탁 진영의 경우는 북한에서 소련군의 후원 아래 장악한 정치 기반을 확대하고자 북한식의 개혁을 남한에도 실시하려 했다.

둘째로, 공위의 초청 대상 선정에서 미국은 논리적 무리를 저질렀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이 민전(民戰)을 통해 한국을 지배하려는 전략에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협상 대상 선정에서 무리한 논리를 펼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1947년 3월)과 맞물려 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이 소련을 적성(敵性)으로 상대했다는 점도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동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주의에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소비에트화 작업이 끝났고 과도정부를 수립할 경우 좌익의 승리가 완연한 상황에서 미국은 위험한 임시정부의 수립보다는 남한만이라도 반공정부의 수립이 유리하다고 판정했다.

셋째, 미국의 정책수행 과정에서 국무부와 현지 미 군정 사이의 의사소통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전체적인 정책 원칙에서 볼 때 국무부와 군정청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인식했느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적어도 마셜(George Marshall)이 이끌던 시기의 국무부는 미·소의 교섭을 방해할지도 모를 어떠한 행동이나 정책 제시를 피하고 싶어 했다. 정부의 외교 정책 부서로서 국무부는 한국을 광범위한 세계적 목적에 따라 검토했다. 그러나 군정, 특히 하지 장군은 처음부터 한국 주재 소련 대표를 다루던 경험을 통해서 소련의 목적이 미국과 다르고, 미국의 목적을 타도하고자 의도적으로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넷째로, 소련의 입장에서 본다면 위성국가의 필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4대국 탁치의 불리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당초 소련은 분할 지배를 공공연히 요구할 수도 없었고 미국의 1국 지배를 방관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익의 분점(分占·sharing)을 구상했다. 그러나 미국의 우경화와 북한에서의 소비에트화 성공에 자신을 얻어 탁치로부터 분할 점령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소련으로서는 한국의 통일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1/4의 지분에서 1/2의 지분으로 이익이 증가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점령사령관 하지의 입장에서는 군인인 그의 눈으로 보더라도 유능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우익이라는 사실은 “서글픈 일(sad thing)”이었다. 이를테면 이승만과 같은 우익의 지도자가 하지를 용공분자로 몰고 김구(金九)가 비타협적 극우로 정국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과업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비관과 함께 자신을 사령관에서 해임해 달라고 본국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하지가 한 군인으로서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것과 한 신생국가의 총독과 같은 점령사령관으로서의 업무수행 능력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헌신적이고 성실했으며 자신의 조국과 한국을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글 전쟁의 십자포화에서 살아날 수 있었지만 한국의 좌익과 우익의 십자포화 속에서는 고전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결국 군인의 길과 정치인의 길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이 겪어본 인종들 중에서 정치적 성향이 가장 심한 민족”인 한국인을 다루는 일이야말로 그가 일생에 겪었던 “최악의 직업(the worst job)”이었다고 푸념했다. 그는 한국을 떠나면서 “내가 만약 정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민간인의 신분이었다면 연봉 100만달러를 준다 해도 그 자리를 맡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하지는 우리에게 누구인가라는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서 살펴본다면, 그는 투철한 무인이었지 행정가는 아니었으며 맥아더와 같은 정치적 감각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패전국가의 식민지를 처리하면서 점령군 사령관을 최고통치권자로 임명하는 미국식의 군정 통치가 과연 현명한 방법이었는가에 대한 반성이 제기될 수 있다. 한국의 해방 정국의 문제는 외교관과 개혁가가 다루어야 할 성격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외교 훈련을 받지 못하고 사회개혁을 불신하는 군인들에게 그 과업을 맡겨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견해가 하지 개인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 추궁으로 돌아가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군인으로서의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고, 신생 독립 국가에 대한 연민과 선의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그를 군림하는 억압자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하지와 미 군정이 한국사에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그는 문득 한나라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공을 세운 책사로서 대부(大夫)의 지위에 오른 육고(陸賈)의 충고를 생각하게 한다. 한고조가 제위에 오른 뒤에 자신이 이룩한 무공을 뽐내자 육고는 “말을 타고 전쟁터에서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乎·사기열전-육고열전)”라고 고조에게 간언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이 고사를 읽고 납득했었더라면 그들은 과연 한국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는 여운이 남는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 2011)을 받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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