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6일 서울 명륜동 족보 전문 출판사인 가승미디어에 모인 원주 변씨 종친회 간부들. 왼쪽부터 변덕희·변구영·변양근씨가 성씨 한자가 제대로 새겨진 족보 표지를 가리키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지난 3월 16일 서울 명륜동 족보 전문 출판사인 가승미디어에 모인 원주 변씨 종친회 간부들. 왼쪽부터 변덕희·변구영·변양근씨가 성씨 한자가 제대로 새겨진 족보 표지를 가리키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조상이 주신 성(姓)을 어떻게 다르게 쓸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일일이 재판을 할 수도 없고…. 특히 후손들 중에는 자신의 성이 잘못 표기된 걸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아요.”

지난 3월 16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가승미디어’ 사무실에 노인들 몇 분이 모였다. 족보 전문 출판사인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원주 변씨 종친회 간부들. 원주 변씨 별좌공파 회장 변덕희(82)씨는 “일제가 자신들이 쓰는 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변씨 성을 마음대로 바꿔버렸다”며 “이걸 바로잡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변씨 성 한자가 ‘邊’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전혀 낯선 글자를 써보인다. 기존의 邊이라는 글자에 들어간 모방(方) 대신 입구(口)를 쓰는 한자다. 한자 위의 스스로자(自)도 흰백(白)으로, 갓머리(宀)도 민갓머리(冖)로 바뀐 글자다. 기자가 처음 보는 한자여서 “이런 글자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우리 조상들의 이름이 적힌 고문서를 보면 다 갓변(邊)이 아닌 성변()을 썼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치면서 갓변이 성으로 둔갑했습니다.”

변덕희씨가 써보인 한자는 현재 사용 중인 워드프로세스에서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고문서에서는 변씨 성이 다 이 글자로 쓰여 있었다는 설명이다. 변덕희씨는 기존에 성으로 쓰는 변은 가장자리라는 뜻의 갓변으로, 그리고 자신이 써보인 변은 성변으로 구분을 했다.

변덕희씨의 말은 확인이 어렵지 않았다. 함께 앉아 있던 가승미디어 이병창 사장이 “바로 확인해 주겠다”며 한국학중앙연구소가 운영하는 한 사이트를 열어봤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c.kr)의 ‘성씨와 본관’ 코너에 들어가 원주 변씨의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명단을 찾았다. 여기서 조선 중종 17년(1522년) 문과에 급제한 변성이라는 사람을 임의로 골라 한자 이름을 ‘원문이미지보기’에서 확인했다. 원문이미지보기는 당사자의 이름이 실린 옛 족보 등을 스캔해 놓은 코너다. 이 자료에는 ‘生員成’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후손의 말대로 변씨 성의 한자가 지금과는 달랐다. 이 사이트에서 확인해본 결과 조선시대 다른 변씨 인물들도 모두 마찬가지였고, 원주 변씨 시조인 고려시대 무신 변안열(安烈·1334~1390)의 한자도 지금과 달랐다. 후손의 말대로 성씨의 한자가 바뀌었음이 틀림없었다. 우스운 것은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사이트의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변씨 한자 역시 모두 갓변으로 표기돼 있다는 점. 현재 사용하는 한자 유니코드의 법정 상용한자에는 진짜 성변 한자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고 한다. 고문서 원본과는 다른 한자가 버젓이 쓰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잘못이 저질러진 원인은 일제에 있다는 게 원주 변씨 종친회 측의 설명이다. 1939년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내걸고 창씨개명을 시작한 일제가 갓변을 변씨 성으로 쓴 게 잘못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우리의 성씨 한자를 자기들 마음대로 고쳤습니다. 자기들이 쓰는 한자에 없다고 아무 한자나 갖다 넣은 셈이죠. 세종 때인 1423년 대마도의 왜인 변삼보라(邊三甫羅) 등 24명이 귀화해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럼 우리 변씨가 모두 이 왜인의 후손이라는 말입니까? 이들에 앞선 우리 조상들이 쓰던 바른 성씨 한자를 되찾아야 합니다.”

변덕희씨에 따르면, 변씨는 원주 변씨 외에도 장연 변씨, 황주 변씨 등 본관이 세 군데다. 모두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같은 한자를 쓰는 성씨다. 이들 변씨의 숫자는 2013년 기준 약 5만2000여명으로 전체 성씨 중 숫자 규모로 65위에 해당한다. 이들 5만명이 넘는 사람 중 대다수가 잘못된 한자를 자신의 성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일제가 물러난 후인 1946년 10월 미 군정이 공포한 ‘조선성명복구령’에 따라 우리의 성과 이름을 되찾았지만 변씨의 경우 광복 후 혼란기에 일제가 쓰던 잘못된 한자를 호적 등에 계속 기재하는 것을 시정하지 못한 셈이다.

변덕희씨는 “그동안 일부 변씨들은 개인이 스스로 나서 호적에 기록된 잘못된 성씨 한자를 바로잡기도 했다”며 “조상들의 한자가 제대로 기록된 옛 족보 등을 가져오면 관청 호적계에서 수기(手記)로 바로 정정해 주지만 그런 고문서가 없으면 종친회의 확인을 받고 재판을 받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의 변씨 집성촌처럼 6·25전쟁 같은 변란을 거치지 않고 옛날 문서들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곳에서는 관청 호적에 제대로 된 한자를 쓴 경우도 있다”고 했다.

문제는 재판을 거쳐 호적상 한자를 바로잡더라도 현재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에는 성변 한자가 없기 때문에 수기를 고집하지 않는 한 잘못된 한자를 알면서도 그대로 쓰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는 것. 때문에 원주 변씨 중에서도 일부 파(派)는 “귀찮으니 기존의 한자를 본래 성으로 알고 그대로 쓰자”는 주장도 나온다고 한다. 이병창 사장은 “1997년 11월 전문가들이 정부의 의뢰를 받아 ‘국제표준 문자코드 제안 한자’를 마련할 때 법정 상용한자에서 우리 조상들이 쓰던 성변 한자는 빼버렸다”며 “지금의 유니코드 체제에서는 한자 하나를 추가하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행정명령을 내려 가장 많이 쓰이는 워드프로세스에 성변을 추가해 넣으면 불편함을 많이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병창 사장은 “변씨뿐 아니라 일제가 성씨 한자를 마음대로 바꾼 사례는 더 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가 성주 도(都)씨. 현재의 도씨 한자는 놈자(者)에 우부방(阝)을 붙인 모양이지만 본래 성씨로 쓰는 도자는 놈자의 날일(日) 위에 붙는 점이 없었다고 한다. 이병창 사장은 “일제가 자신들이 쓰지 않는 한자인 데다 비하한다는 뜻에서 놈자(者)를 성씨에 갖다 붙인 걸로 안다”고 지적했다. 한국역대인물정보종합시스템에서 찾아보니 고문서에 기재된 도씨 역시 이 말대로 놈자(者)에서 점이 빠진 모양이었다. 이 본래의 도씨 한자 역시 지금의 워드프로세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글자다. 도씨 역시 2013년 기준 5만2000여명으로 집계돼 있다.

2013년 새누리당 김재경 의원이 안전행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정부의 주민등록시스템에 등록되어 있는 성씨는 4706개였다. 이 중 멘·분·속씨 등 10인 이하의 소수 성씨가 4332개로 전체 성씨의 92%를 차지했고 이 중에서도 곰, 굳, 길란 등 1인 성씨가 3025개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부분 국내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들로, 지금 우리 행정체계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성씨를 공식 성씨로 그대로 인정해 준다. 이병창 사장은 “소수 성씨를 이렇게 많이 만들어내면서 정작 우리 조상이 사용하던 제대로 된 성씨 한자를 되살리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며 “우리 성씨를 한자로 기록한 족보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과학적인 문화유산으로 우리가 제대로 지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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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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