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재성 파산부 수석부장판사가 물의를 빚은 광주지방법원. ⓒphoto 조선일보 DB
최근 선재성 파산부 수석부장판사가 물의를 빚은 광주지방법원. ⓒphoto 조선일보 DB

“선 판사는 그나마 향판(鄕判) 중에 양반이에요.” 광주광역시 등 지방에서 수년간 근무했던 한 검사는 얼마 전 사석에서 이같이 말했다. 최근 불거진 선재성 광주지방법원 파산부 수석부장판사의 부적절한 법정관리인 선임 파문과 관련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파산 업무를 전담하면서 친형과 고교 동문, 심지어 전 운전기사 등 측근을 법정관리 기업의 관리인이나 감사로 앉힌 선 판사보다 문제있는 향판(지역법관)이 많다는 얘기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라는 걸까.

전체 법관 중 향판 13%

향판은 지난 2004년 경향(京鄕) 교류제로 인사 이동이 잦고, 이로 인해 인수인계가 잘 안되면서 재판이 부실해진다는 우려를 없애기 위해 도입됐다. 판사의 80% 이상이 수도권 근무를 선호하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짧게 근무하려 한다. 이같은 희망을 다 맞춰주기는 쉽지 않다. 그러자면 인사를 시도 때도 없이 해야 한다. 법원 인사철이면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머리 아픈 사건의 선고를 미루다가 다른 데로 옮기면 후임 법관은 재판기록을 다시 또 처음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사건 당사자들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따라서 국외 연수, 재판연구관 등 선발, 인사 배려 등 ‘당근’을 제시하며, 희망하는 법관에 대해 지방에서 장기간 근무토록 하는 향판을 운영하게 됐다.

취지에 맞춰 수도권은 향판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고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4개 고등법원 관할 내에서 이뤄진다. 신청자가 선호 지역 순서대로 1·2·3·4지망, 많으면 5·6지망까지 적어 내면 법원행정처의 심사를 거쳐 결정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다른 지역으로의 전보 없이 해당 지역 법원에서 최소 10년 이상 근무한다. 현재 전체 법관 가운데 약 13%가 향판으로 추산된다. 대법원은 ‘법관의 사생활 보호’ 이유를 들어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서동칠 대법원 홍보심의관은 “향판은 법규에 규정된 게 아니라 내부적 인사운영의 기준으로 운영된다”며 “대법원장 전보 인사권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한곳에 오래 근무하다 보니 지역 주민들과 유착할 우려가 크다는 점이다. 현직 향판을 친·인척으로 둔 한 지인은 경험담을 하나 이야기해줬다. 이 판사가 몇 년 전 대전에서 근무할 당시 한 건설업체에서 접근해왔다. 처음에는 그냥 의례적인 친절함이라고 여겼는데 딸의 생일날 “○○호텔에 연예인을 불러 파티를 하기로 했으니 데리고 오라”고 해서 거절하고, 다음부터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지방의 한 경찰은 “민사재판에서 향판 몇 명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로비한다는 것이 지역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했다.

전관예우 심각… 개업 1년 내 감형 실적 탁월

2009년 5월 신영철 대법관의‘촛불 재판’개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부산지방법원 단독판사들.
2009년 5월 신영철 대법관의‘촛불 재판’개입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부산지방법원 단독판사들.

2009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부산고법의 한 부장판사를 소환조사하기도 했다. 이 판사는 부산 지역에서만 20년 이상 근무했고, 박 전 회장의 기내난동사건 당시 1심 담당 판사를 다른 판사로 바꿔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샀다. 전주지법 군산지원에 근무하던 판사 3명은 2006년 지역 유지로부터 골프 접대를 받는 등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다 대법원이 감사에 착수하자 사직했다. 이번에 물의를 빚은 선재성 부장판사도 법관 생활 21년 중 19년을 광주·전남에서 보냈다. 그는 지역 향판 중에서도 합리적 판결을 많이 해온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지역 인물들과의 유착을 떨쳐내지 못했다.

향판은 같은 지역에서 장기간 근무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져 근무의욕의 저하가 생길 수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몇 년 전 아는 향판이 영장전담판사로 있었는데 퇴근 무렵에 검찰에서 긴급히 영장을 신청했다”며 “퇴근해야 해서 다음날 신청하라고 했는데도 검찰에서 급하다며 들이밀기에 ‘판사가 영장을 검토할 시간이 없어 기각’이라고 적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더라”고 전했다.

향판은 전관예우가 심하다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온다. D 변호사는 “몇 년 전 지방으로 발령난 한 판사가 향판들이 자신을 배제하고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갖는다고 털어놨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향판 출신 변호사들이 마지막으로 근무한 법원에서 개업 뒤 1년 동안 수임한 형사항소심 판결을 분석해보니 피의자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감형을 받은 경우가 51%에 달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향판들이 향판 출신 변호사들이 맡은 사건을 관대하게 처리해준다는 얘기다.

타지 변호사들 활동 힘들어

대법원이 지방 고법에 상고부 설치를 반대하는 것도 향판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지방 변호사들은 “대법관 1인당 월 150여건의 사건을 처리해 대법원에 상고된 사건의 3분의 2 이상이 재판도 받아보지 못하고 기각을 당한다”며 지역 고법에 일부 상고심을 다룰 수 있는 상고부 설치를 주장한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지역적 연고주의 폐단의 우려가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 소속된 한 변호사는 “서울 변호사들이 지방 재판에 들어가면 향판들이 증인 신청도 잘 안 받아주고 ‘지방까지 왜 와서 변호하냐’는 식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며 “지방 사람들도 향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서울에 와서 재판받으려 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최학세 경남변호사회 회장은 “고향 등 연고지에서 오래 근무하는 판사들은 아무래도 학연과 지연이 같은 변호사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은 게 사실이고 특정 변호사와 의심을 살 수 있는 관계에까지 이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향판은 국회에서도 도마에 올랐다. 2006년 당시 김동철 의원(열린우리당)은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지역 법관 대부분이 형사합의부나 영장전담판사 등 주요 재판부에 위치해 토호 세력과의 유착 가능성이 크다”며 “이 때문에 재력 있는 사람이 주로 신청하는 보석 사건의 인용률은 지역 법관제가 없는 지역에 비해 5∼6%포인트가량 높다”고 주장했다.

향판을 아예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지부장인 이상갑 변호사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보 수집이 어렵고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에는 향판제도가 필요했을지 몰라도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고 인터넷문화가 활성화된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며 “향판을 폐지하는 것만이 ‘제2의 선 부장판사 사건’을 막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승진서 배제되면서 소명의식 저하

판결을 앞두고 고심 중인 판사.
판결을 앞두고 고심 중인 판사.

향판에 대한 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향판이 아니면서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판사는 “향판은 지역 실정을 잘 알고 주거 이동이나 생활환경 변화에 신경 쓰지 않고 안정적이고 책임있게 재판에 신경 쓸 수 있는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검찰 출신인 대전의 조수연 변호사도 “전통적으로 지역 토호들이나 변호사들과 술 마시고 룸살롱 다니고 하는 것들이 흔히 문제가 된 것인데, 요즘엔 함께 마시고 싶어도 향판들이 안 마신다”고 말했다.

향판이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향판이 되도록 권유하면서 처음에는 인사 배려가 제시됐으나 실제로는 대법관이나 주요 법원장으로 진출하는 기회가 적다 보니 법관으로서의 소명의식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1991년 이후 배출된 대법관 40여명 가운데 향판 출신은 안용득·송진훈·조무제 전 대법관 등 3명에 불과하다. 이같은 점을 의식했는지 대법원은 지난 2월 고위법관 60명의 승진·전보 인사를 하면서 향판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통상 2~3명 승진에 그쳤던 과거와는 달리 올해는 승진자 18명 중 3분의 1인 6명이 차관급 예우를 받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발탁됐다.

향판은 외국에도 있다. 윤태석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도 주별로 법관이 정해져 있고 일본도 지역 법관제가 잘 활용되고 있는 만큼 결국 국민이 제도적으로 법관 인사를 통제할 수 있는 통로를 보완책으로 만들면 된다”고 밝혔다.

존경받는 향판도 많다. 2004년 법복을 벗은 조무제 전 대법관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딸깍발이 판사’ 등으로 불렸던 조 전 대법관은 대법관 취임 전까지 줄곧 영남에서 향판으로 일했다. 대법관 취임 당시 재산 신고 총액이 7000여만원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청빈 법관의 대명사가 됐다. 대부분의 법관 생활을 부산과 경남에서 지낸 대표적 부산 향판인 박흥대 부산지법원장은 철저한 재판 준비와 부드럽고 친절한 재판 진행으로 법조계 안팎에서 신망이 두텁다. 이번 선재성 판사 사건에 대해서도 향판보다는 파산 회생절차의 문제점이 더 근본적인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대법원은 향판의 근무 기간을 단축하고 인사 경로와 권역별 비율 문제를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대법원의 개혁안이 과연 해묵은 향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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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원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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