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사건’ 65주년을 맞아 당시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던 ‘소련파’의 신상기록이 대거 발굴됐다. ‘8월 종파사건’은 1956년 8월 30일, 만주파(빨치산파) 김일성을 정점으로 초기 북한정권을 떠받치던 소련파와 연안(延安)파가 김일성 절대권력에 도전했다가 대부분 숙청당하며 와해된 사건이다. 당시 소련파와 연안파를 각각 비호했던 소련, 중국의 외교개입으로까지 비화된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 절대권력을 위협했던 사실상 마지막 사건이기도 했다. 그 결과 김일성은 견제받지 않는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고, 만주파의 지원 아
6·25전쟁 와중에 북한과 구소련이 전쟁 발발 책임을 남한과 미국 측에 떠넘기기 위해 ‘북침(北侵)설’의 근거를 모아 국제사회에 배포한 자료집이 발견됐다. 북한 문화선전성 대외문화연락부 산하 신조선출판사가 1951년 12월 출간한 ‘조선 동란을 일으킨 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자료’라는 제목의 259쪽 분량의 책이다. 발간사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당수로 북한 정권 수립 직후 초대 부수상 겸 외무상을 맡았던 박헌영이 썼고, 책은 러시아어와 영어는 물론 독일어와 체코어로까지 번역 출간돼 국제사회에 배포된 것으로 확인됐다.책의 내용은 19
건국 대통령인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이 4·19혁명으로 하야하기 6개월 전인 1959년 10월까지 북진통일론을 미국 측에 설파했고, 이로 인해 미국의 강한 경계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미 국무부 기밀문건이 발견됐다. 7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55주년를 앞두고 공개된 이번 문서는, 1959년 10월 방한한 미국 국무부 부장관 더글러스 딜런(1909~2003)이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고 이틀 뒤인 10월 25일 미국 국무부 앞으로 타전한 기밀문서다.문서 상·하단에 ‘기밀(Confidential)’이라고 적힌 문건에
기밀해제된 구(舊)소련 정부 문서에는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던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 간의 날카로운 대립도 담겨 있다. 1966년 작성된 해당 문서에는 “전쟁 기간에 김일성과 펑더화이를 수반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사이에 날카로운 불화가 생겼다”며 “한번은 김일성이 펑더화이의 사령부로 이동했을 때, 중국 측 경비대는 김일성을 막아섰고 오랜 시간 동안 억류했다”고 적고 있다.중국 경비대 김일성 억류김일성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6·25전쟁 도발 당사자였고, 펑더화이는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南侵)으로 시작됐음을 인정한 구(舊)소련의 1960년대 기밀문서가 발견됐다. 구소련 외무성이 1966년 8월 9일 작성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부장이었던 올렉 라흐마닌(1924~2010)에게 보고한 ‘1950~1953년 조선전쟁과 휴전담화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문서다.해당 문서는 “김일성은 미국이 남조선을 위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무력통일에 통과를 받도록 간절히 노력했다”며 “김일성이 1950년 3~4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
소련공산당이 국가안전위원회(KGB)를 통해 공식 파악하고 있던 김일성 가계 문건이 공개됐다. 주간조선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립현대사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던 ‘김일성 친족 정보보고’ 문건을 입수했다. 최근 기밀해제된 이 문서는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 국민대 선임연구원이 모스크바 현지에서 입수해 주간조선에 제공했다.1969년 작성됐고 수신인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되어 있는 이 문건은 “주카노프 동지의 부탁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과 국가기관에서 책임 일꾼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일성의 친족에 대한 정보를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당시 북한 내부 사정을 다룬 구(舊)소련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푸에블로호 사건은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 정보수집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피랍된 사건을 가리킨다. 피랍 과정에서 미 해군 승조원 1명(듀엔 호지스)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푸에블로호의 초대 함장인 로이드 부커 중령 등 82명의 승조원이 북한 당국에 의해 구금됐다. 이들은 같은 해 12월 23일 석방되기까지 구타와 고문 등 11개월간 비인간적인 가혹행위를 당했다.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만에 발생한
‘조선(朝鮮)’이란 이름의 어원을 풀이한 논문이 등장해 주목을 끈다. 조선은 단군 왕검이 건국한 고대 국가인 ‘고(古)조선’ 이래 한반도에 등장한 역대 정권이 고려(高麗), 한(韓) 등과 함께 가장 즐겨 쓴 국호 중 하나다. 1392년 고려의 무장이었던 이성계가 건국한 나라도 조선이란 국호를 채택했다. 북한은 지금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식 명칭으로 쓴다. 19세기 구한말 이래 조선은 한자로 직역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Morning Calm)’로 서양에 소개되기도 했다.하지만 조선이란 말의 유래와 정확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당시 보증을 선 ‘이청산’의 존재가 밝혀졌다. ‘이청산’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국외 요주의 인물’로 시찰해온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안투현위원회 간부 이청산(李靑山)이다. 앞서 주간조선은 2551호(4월1일자)에서 김일성이 1941년 소련으로 월경한 직후 소련 당국으로부터 심사를 받을 때 자필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력서를 최초 공개한 바 있다. 이 이력서에서 김일성은 “1931년 동북 펑톈성 안투현에서 중공(중국공산당) 조직에 가입했다”며 “중국공산당 청년단 활동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노래다. 동요 ‘학교종’. 김메리 선생이 작사·작곡했다. ‘학교종이 땡땡땡’이란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8년 탄생했고, 요즘도 동요로 널리 불린다. 음악스트리밍 서비스 지니에서 ‘학교종’을 검색해 봤다. 210여곡이 나온다. 비슷한 제목의 다른 노래는 제외한 숫자다. 합창단이 부른 ‘학교종’, 자장가처럼 편곡한 ‘학교종’, 아이가 부른 ‘학교종’ 등 다양하다.69년간 한국인의 애창동요였지만 저작권료는 단 1원도 받지 못했다. 김메리 선생과
[image1]중일전쟁 당시 중국공산당의 항일 근거지였던 산시성(陕西省) 옌안(延安)엔 현재도 20대 청년들이 팔로군 군복을 입고 마오쩌둥(毛澤東) 토굴집과 혁명기념관 등을 답사한다. 서구 문화를 동경하고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현대 중국 젊은이들에게도 옌안은 여전히 혁명의 성지이자 대장정의 종착지다. 하지만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같은 시기에 옌안에 머물며 항일전쟁을 함께 치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38년 우한(武漢)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의 총부와 군정학교가 옌안에 있었다. 지금도 그들이 살던 토굴집이 남아 있고 군정
지난 9월 13일은 ‘일본판 쉰들러’라고 불리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 ~1953) 변호사의 사망 63주기다. 이에 맞춰 일제강점기 때인 1927년 10월, 후세 변호사가 내한했을 때 조선총독부의 언론집회 폭압을 강력 규탄하는 선전포스터가 발견됐다. 1927년 10월 13일자 조선일보에 일부가 노출된 이 격문에는 ‘언론집회폭압탄핵 대연설회’라는 제목과 함께 ‘시일(일시) 10월 13일 오후 7시’와 ‘장소 종로청년회 급(及·및) 공회당 양처’ 등이 명시됐다. ‘하자! 오라!! 드르라(들어라)!!!’란 말과 ‘입장 무료’란 말
라스팔마스시에 진입하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오래된 마을의 따개비 집들이 정답게 보인다. 점심시간인데 차 안 온도계는 영상 23도를 가리키고 있다. 11월의 날씨 치고는 따스한 편이다. 집에서 나와 자동차로 반 시간을 달려오니 벌써 항구도시의 복잡한 골목길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촘촘히 도로 양편으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바닷가 아파트 단지의 풍경이 세련되다.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세르반테스, 콜럼버스가 태를 묻은 땅, 스페인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은 남다르다.이곳은 50여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국인 원양(遠洋)선원의 애환이 서려
지난 11월 4일 인천공항으로 유해 4구가 들어왔다.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스페인령(領) 라스팔마스에서 봉환된 유해였다. 유해의 주인공은 1976년 라스팔마스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사망한 김모씨 등 원양선원 4명. 1975년에서 1983년 사이 라스팔마스 해역에서 조업 중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원양선원들이었다. 이 중에는 세 살 된 딸을 포함해 세 자녀를 두고 44살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 26살 나이에 자녀도 없이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 선원도 있었다. 이날 인천공항으로 돌아온 유해는 유족에
오는 10월 2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1895년) 120주년’을 앞두고 임오군란(1882년) 당시 명성황후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는 기록이 한글로 완역 공개됐다. 2006년 발견된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는 당시 피신 중이던 구(舊)한말의 실권자 명성황후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자료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구식 군대의 반란을 피해 궁궐을 떠난 직후 극심한 인후염(咽喉炎)을 앓았고, 다리에는 종기가 나 고름이 생겼다. 피란 중후반에는 7~8월의 무덥고 습한 날씨 속에 ‘말라리아(학질)’에
지난 2월 18일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의 무덤 앞에는 분홍색 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있는 독일 출신 음악가의 무덤이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君が代)’의 작곡가다. 그의 무덤을 찾은 건 일본인들이 국가의 작곡가를 찾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희망의 날개’와 같은 한·일 우호 프로그램을 제작한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의 TVK 등 지방 방송사의 고위 관계자와 주한 일본대사관의 관계자들도 조만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묻힌 에케르트의 묘역을 참배
1909년 음력 8월 10일 전남 함평군 학교면 진례 들판. 최택현(崔澤鉉·48), 최윤룡(崔潤龍·26), 최광현(崔匡鉉·55), 최병현(崔柄鉉·47) 등 네 명이 들판에 세워둔 나무 형틀에 묶였다. 죄목은 의병운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최택현과 최윤룡은 부자간이고, 최광현과 최병현은 최택현의 4촌. 네 사람은 전남 나주의 명문가인 수성(隋城) 최씨의 일가들. ‘탕’소리와 함께 최씨 집안 네 명은 일본군이 쏜 총에 살해됐다. 일주일 뒤인 1909년 음력 8월 17일. 시아버지(최택현)와 남편(최윤룡)의 장례를 치른 나주 임(林)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