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의 누이가 있었다. 전양지의 처 하씨이다. 경상도 선산부에서 살았다. 1469년 하씨는 남형제의 자녀와 여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친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작성된 상속문서가 ‘전양지 처 하씨 점련문기’이다. 분배된 노비를 헤아리면 모두 9명이다. 그들의 부모가 어떤 신분이고 언제 결혼하여 그들을 출산했는지를 소개한다. *표를 한 것이 9명의 노비다.1410년경 노(奴) 중생이 양처(良妻) 금장과 결혼하여 1412년에 1소생으로 비(婢) 실대*를, 1430년에 4소생으로 비 옥금*을 낳았다.
1 이영훈 교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에서 세종을 양반들의 성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백성들의 성군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 근거로 그는 세종의 노비정책과 사대주의 외교를 들었다. 나는 주간조선 2510호에서 노비정책에 대한 이 교수의 사실왜곡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이 교수는 주간조선 2512호를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따라서 세종의 외교정책을 살피기 전에 세종시대 노비정책에 대한 이 교수와 나의 논쟁을 짧게 요약할 필요가 있다. 이 교수가 세종을 16세기 노비 폭증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세종이
1 15~17세기 전체 인구의 30~40%는 노비였다. 그들은 주인의 재산으로서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이었다. 노비에게는 주인을 고소할 법 능력이 없었다. 이에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큰 죄가 되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이 사실에 근거해서 조선왕조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렇지만 노비의 상당 부분이 노예인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에서 노예제 범주는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대조적으로 고려왕조의 사회구성에서 노예제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추측과 논박’(2002)에서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수에 대한 두 종류의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진리로 간주되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담한 추측에 대한 사회의 관용과, 그 추측이 다른 사람들의 논박을 넘어서지 못했을 때 스스로의 오류(실수)를 인정하는 개인의 솔직함이 그것이다. 만약 그 추측이 엄격한 비판(논박)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 이론이 다른 경쟁 이론보다 우리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논증될 때” 비
이언주 의원 [image1]이언주 의원은 정책 추진 과정에 대해 “반헌법적인 독재행위이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 이 의원은 “의료법에서는 영리 행위를 금지한다. 영리 자법인 설립을 의료법 개정 없이 우회적인 방법으로 하겠다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크다.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를 이해 관계자들이나 전문가들과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추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병원협회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보건의료단체가 반대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의원과의 일문일답.- 정부는 병원의 적자구조 개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