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어느 날이었다. 대한전선 도시바 흑백TV로 가요프로그램을 보는데 처음 보는 남자 가수가 나왔다. 훤칠하지도 세련되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외모의 가수가 나와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데도 귀에 낯설지가 않았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조용필(1950~) 이야기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신인가수 조용필과 첫 대면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알려진 대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산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다. 대중문화의 대부분이 중심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비극 ‘햄릿’이 세상에 나온 게 1601년. 이후 ‘햄릿’은 지금까지 매년 전 세계의 연극무대에 오르며 시대에 맞게 변주되고 있다. ‘햄릿’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명언(名言)과 명구(名句)의 저수지다. ‘햄릿’은 영문학도가 아닌 사람의 입에서도 수시로 인용된다. 1막5장은 덴마크 왕자 햄릿이 성벽에서 선왕(先王)의 유령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햄릿은 유령의 말을 듣고 수하들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암시한다.“그러므로 그걸 낯선 손님처럼 환영하게.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인간의 철학으론
사람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꿈을 자주 꾸는 사람과 꿈을 거의 꾸지 않는 사람.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은 잠깐의 토막잠 속에서도 다채로운 스토리가 펼쳐진다. 어떤 사람은 꿈속에서 아는 사람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그들과 나눈 대화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국의 성인 남자들이 흔히 꾸는 꿈이 군복무와 관련된 것이다. 지인은 꿈에 재입대 영장이 나와 “군대에 다녀왔는데 무슨 재입대냐”고 버텨 보았지만 결국 군에 끌려가는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전역한 지 30년이 지났건만 꿈속에서는 아직 전역하지 않았던 것이다.군복무 못지않게 한국인의
오드리 토투(1978~), 소피 마르소(1966~), 쥘리에트 비노슈(1964~), 이자벨 아자니(1955~), 아누크 에메(1932~), 카트린 드뇌브(1934~), 브리지트 바르도(1934~).기억 속에 있는 프랑스 여배우들이다. 벽촌(僻村)에서 성장한 까닭에 나는 청소년기에 ‘할리우드 키드’가 될 여건이 주어지지 못했다.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로 외국 영화를 만나는 게 영화 세상과 접하는 전부였다.소피 마르소, 쥘리에트 비노슈, 이자벨 아자니는 연배가 비슷해서 상대적으로 그들의 영화를 많이 접한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소피
소설가 이태준(1904~?)이 ‘소련기행’을 발표한 게 1947년이다. 이태준은 1946년 북조선작가동맹의 일원으로 소련 전역을 70여일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가 황해도 은율의 휘문고보 친구집 사랑방에서 수개월간 기식하며 써낸 책이 ‘소련기행’이다. 조선의 문장가 이태준이 그려낸 ‘사회주의 전범(典範) 국가’ 소련은 눈부신 낙원이었다. 소련은 당시 사회주의에 환상을 갖고 있던 피압박민족 지식인의 눈에 그렇게 비쳤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20세기를 산 세계인들에게 가
나이 쉰여덟. 작가로서 그는 모든 것을 이룬 상황이었다. 지구상 모든 전업작가의 꿈인 인세수입만으로 그는 중상류 생활을 구가하고 있었다. 파리 근교에 근사한 별장도 있었다.고교 졸업 학력이 전부인 그가 극빈자 생활을 전전하다 출판사 직원을 거쳐 전업작가의 길로 뛰어든 게 스물여섯. 1877년 ‘루콩마카르 총서’ 7권째 소설인 ‘목로주점’이 대박을 터트리면서 그는 비로소 돈걱정에서 해방되었다. 나이 서른일곱.그는 정진(精進)했다. 총서 20권을 쓰겠다는 약속대로 그는 매년 한 권씩 소설을 발표했다. ‘나나’ ‘제르미날’ ‘인간짐승’
“과거에 있었던 일은 과거의 일일 뿐이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지만 (이는 과거로) 남겨두고 미래로 향하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는 일관된 주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지향하고자 하는 관점이다. 베트남에 한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 국가로서 미래를 위해 같이 나가고 싶다.”또아인뚜언 베트남 외교아카데미 부소장이 지난 12월 초 한국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은 꿈의 나라다. 1960~1970년대 한국인에게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 젊은이들에게 ‘한국 비자’는 성공으로 가는
그들의 호칭은 부르는 사람의 연령대에 따라 변한다. 처음에 그들은 ‘군인아저씨’로 불린다.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여학생이 주로 이렇게 부른다. 요즘은 사라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생들은 초겨울이 되면 그들에게 의무적으로 편지를 써야만 했다. ‘전방에 계신 국군 아저씨에게’로 시작하는, 누가 받는지도 모르는 위문편지다.중학생이 되면 그들은 이제 ‘군인오빠’로 친근하게 불린다. ‘군인오빠’라는 호칭은 이들이 20대가 되어서도 당분간 유지된다. 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면 군인과 군대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든다. 거
한국이 세계인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준 최초의 사건은 88서울올림픽이었다. 그전까지 한국은 6·25전쟁 당시 야전병원을 다룬 미국 드라마 ‘매시(MASH)’에서 그려진 것처럼 남루한 이미지였다. 하계올림픽의 하이라이트는 예나 지금이나 마라톤이다. 서울올림픽 당시 잠실주경기장을 출발한 마라톤은 강남 테헤란로~88올림픽도로~여의도~강북강변도로를 지나는 코스였다. 세계인은 마라톤 중계방송을 보면서 한국의 발전상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우리는 상상도 못 했지만 유럽 공산권 국가의 국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울 잠실벌에서의 날갯짓은 1
조니 뎁, 주디 덴치, 윌렘 대포, 미셸 파이퍼, 케네스 브래너, 데이지 리들리, 페넬로페 크루즈…. 영화팬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명배우들이다. 이들이 모두 한 영화에 출연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에서다.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의 대표작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세상 빛을 본 것은 1934년. 나오자마자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추리소설이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1974년. 리처드 위드마크, 숀 코너리, 앤
어떤 영화도 실제보다 더 실감 날 수는 없다. 거장이 만든 영화라 할지라도 픽션은 픽션이다. 설령 그 픽션이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劇化)했다고 해도 말이다.지난 11월 22일 유엔군 사령부가 공개한 JSA 귀순병사의 동영상이 그랬다. 폐쇄회로(CCTV)와 적외선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은 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러닝타임은 2분도 안 되지만. 거의 열 번도 더 돌려 봤을 것이다. 적외선카메라에 찍힌, 쓰러진 북한 군인 오청성 병사 모습에서는 어떤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오 병사의 복부에서 나온 회충 무더기가 오버랩되어 가슴이
일요일 저녁 식탁에 고추장찌개가 올라왔다. 어, 고추장찌개네. 그러고 보니 전날 택배로 온 CJ홈쇼핑 박스를 개봉할 때 청국장찌개 8봉지에 고추장찌개 2봉지가 들어있었던 게 생각났다. 한 숟갈 떠서 먹어 보았다. 얼큰하고 걸쭉한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감격했다. 아~ 바로 이 맛인데. 무심하게도,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이 맛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고추장찌개를 흰쌀밥에 부어 쓱쓱 비벼 소파에 앉아 올레TV로 ‘물랑루즈’를 시청했다. 다른 반찬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땀을 흘리며 나는
“…이 세상에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 간의 가장 큰 이슈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모르는 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베를린에 한번 와보라고 합시다. 세상에는 공산주의가 미래의 흐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도 베를린에 와보라고 합시다. 유럽이나 다른 곳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일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베를린으로 데려옵시다. 공산주의는 나쁜 제도지만 경제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라고 말하는 이들도 일부 있는 모양인데, 그들도 베를린에 한번 와보라고 합시다. 자유란 어려운 것이
1980년대 초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대체로 전두환 정권에 깊은 반감이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친구들이 강제징집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전두환 정권에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리영희의 책과 대자보의 영향으로 ‘매판자본’ 운운하며 한국의 미래를 어둡게 전망했다. 사회에 진출한 이들이 넥타이 차림으로 거리로 뛰쳐나가 스크럼을 짠 게 1987년 6월항쟁이었다. 이른바 386세대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사회에 나와서도 나는 한동안 민주화 진영에 심정적 지지를 보냈다. 산업화 세력을 대표
나는 카탈루냐와 털끝만큼의 인연도 없다. 이상하게 기회가 닿지 않아 카탈루냐는커녕 이베리아반도 한쪽 귀퉁이도 아직 밟아 보지 못했다. 그 흔한 깃발관광으로도.물론 관념적으로는 카탈루냐 지방을 수없이 다녀왔다. 이십대 초반에 스페인내전에 심취한 적이 있었고, 오십대에 접어든 지금은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를 책상에 두고 틈날 때마다 읽는다.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 메시가 뛰고 있는 FC 바르셀로나를 좋아하고, 가우디를 키운 도시 바르셀로나를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 후보 도시로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다.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독
정동길 정동교회 앞, 광화문 미대사관 옆, 금화터널 아래, 잠수대교 남단, 상암중학교 정문 앞….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서울의 이 장소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곳에는 라운드어바웃(round-about), 회전교차로가 설치되어 있다. 회전교차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양상이다. 지난 10월 13일 금요일 밤.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 4차전이 경남 창원야구장에서 열렸다. TV 중계 화면에 홈플레이트 뒤편의 현수막이 잡혔다. ‘회전교차로는 회전차량이 우선’.창원시는 천만 야구팬이 주목하는
롯데월드타워는 확실히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서울은 그동안 도시의 역사와 규모에 비춰 내세울 만한 랜드마크가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롯데월드타워는 높이 555m로 세계 5번째다.롯데월드타워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광장에 세워진 낯선 동상을 살펴보게 된다.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의 동상이다. 괴테 동상이 왜 이곳에?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이 동상은 베를린의 대표 공원인 티에르 가르텐에 있는 괴테상(像)을 그대로 본떠 제작한
요즘 중년층은 만나기만 하면 우리가 어쩌다 김정은의 핵(核)인질에 이르렀는지를 한탄한다. 전쟁만은 안 되니 북한 핵을 인정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자조적인 말도 나온다. 핵인질 얘기를 나누다 보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역대 대통령의 책임론(論)으로 이어진다.북한의 핵무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우리는 모두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하는 줄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일제히 터졌던 축포(祝砲) 소리를 지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문상을 갈 때마다 정주영(1915~2001)을 생각하게 된다. 장례식장 로비에는 아산의 흉상이 놓여 있다. 서울아산병원을 보면 그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생전의 아산을 여러 번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그에 대한 감회가 조금은 각별하다. 새벽녘 청운동 자택에서 함께 탄 쏘나타 승용차 안에서 잡아 보았던 두툼하고 따스했던 손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정주영을 실감하게 된 것은 1989년 울산에서였다. 현대중공업 파업사태를 취재하러 내려갔다가 조선소 구석구석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자동차로 한
헌법재판관 후보자에서 자진사퇴한 변호사의 이름은 곧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주식투자만으로 1년에 12억원을 벌었다는 실화(實話)는 개미들의 무덤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전설로 빛날 것이다. ‘워런 버핏이 울고 갈 사람이다’라는 댓글이 모든 걸 함축한다. 한때 개미의 한 사람이었던 나 역시 그녀를 기억할지 모른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그녀의 투자 실력으로 인해 나의 무능력을 깨달았으니. 그저 부러울 뿐이다. 나는 왜 저렇게 못 했을까.세진(世塵)에 사는 우리는 모두 속인(俗人)이다. 가정을 꾸렸으면 가정을 지켜야 한다. 자식을 낳았으면